길을 묻는다.
시인 /최장락
오랜만에 길을 묻는다.
사람들 가슴에 길이 있어
내게 없는 길을 묻는다.
골목을 돌아가면 나올 것 같은데
몇번이나 허우적거리다
결국 사람들 가슴에 있는 길을
조심스럽게 묻는다.
발길에 체여 사라진 길이
가슴으로 들어와
또 하나의 지도를 완성한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긴 머리 팔랑이며
길을 풀어놓고 간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길 위에
또 다른 길이 가고 있었다.
고래
시인 / 김기석
푸른물결 가르면서 산등성이 꿈틀댄다.
웅장한 산등물결 비호처럼 날센 동작
저 멀리 잠수함 한 척 불 속으로 숨는다.
큰 산이 달려가니 작은 산도 따라간다.
등성이 뿜어대는 분수대가 요란하다.
무지개 피워내면서 파도치기 흥겹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다섯바다 누비면서
엄청나게 먹어치운 "클릴" 맛도 좋았지만
태화강 풍물소리 들리는 동해바다 더 좋아
사랑니
시인 / 김훈
그래, 이제 예감으로 알았던
사랑할 때가 되었음의 이유로 하여
새벽 열정처럼 어느날 여린 잇몸을 뚫고
옹골차게 솟구치는 순수
잊혀진 전설의 맨살을 온몸으로 껴안자.
그리하여 퇴화해가는 그대와 나의 어울림으로
당찬 아귀지닌 산도둑놈 같은 사내의 팔뚝이거나
차라리 진화를 거부한 한 마리 처여한
짐승으로 돌아가
이 시대의 생기로운 불빛으로 살자.
풀어헤친 그대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
눈물의 숭고한 고요 속에서
볼 두덩이 가득, 때로 긴밀한
그리움의 자유로 일어서는
아! 가진 것 이미 다 주어 오히려 포만인
우리 진실로 사랑함의 증거,
오늘 내 입 속에서 더욱 단단하게 굳고 있다.
아직은 꽃 피울 때
시인 / 하정임
막을 길이 없다
무더기로 벌어지는 꽃들의 붉은 말이여
저 팔짱을 끼고 피어나는 개나리의 섣부른 외출이며
서로 몸 섞으며 둥글어지는 거친 자갈들의 울음이며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흐르는 강물들의 조바심이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나비 날개의 분주함이며
비를 내린다고 하늘을 쑤셔대는 새들의 상처난 부리며
아카시 등걸 사이로 새 집을 짓는 개미턱의 연약함이며
막을 길이 없는 것들아
빈방 주인을 기다리는 먼지의 애절함 같은 것들아
사랑하는 사람의 속눈썹 위에서 떨고있는 것들아
아직은 꽃 피울 때
아침에는 눈 내리고 저녁에는 봄비 상처난 부리 닦아준다.
은월봉
이곡 <고려시대 학자>
흰구름은 뭉게뭉게 은하수를 가리고
차가운 달 속은 계수나무 꽃으로 가득하네
높은 산봉우리에 달이 걸리니 산은 더욱 높아
산그림자가 저절러 발끝에까지 와 닿는구나
숨은 시흥이 맑은 밤에 저절로 일어나
높은 소리로 읊어보니 저녁 노을 보기 부끄럽구나
불사약 훔친 항아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람과 이슬에 가느다란 강이 젖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