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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는 지난해 10월 22일 돌아가신 서애 13대 종부 고 박필순 여사를 말한다. 마당에 늘어서 있던 차들이 생각났다.류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원래 부모상은 3년을 나야 돼. 그런데 그거 지키는 집이 거의 없어요. 지난해 학봉(鶴峯·김성일·조선 중기 때의 명신이자 학자)의 종손이 돌아가셨는데 차종손이 3년 탈상을 한다데. 나도 3년 탈상을 해야 하는데 90 먹은 노인이 하겠나. 학봉 차종손은 젊으니까. 젊다고 해도 70이 다 됐지만, 허허.”
서애 종가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는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류 할아버지는 그래도 제례만은 전통을 고수한다고 했다.“남아 있는 게 제례예요. 제사는 성의지. 살아 있는 어른에게 효도하는 것처럼 돌아가신 어른에게도 효도를 하는 게 제사야.”
류 할아버지는 1년에 13번 제사를 지낸다. '주자가례'에 따라 고조까지 4대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그의 어머니가 두 분이니 총 9번이다. 설·추석 차례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서애 선생에 대한 불천위 제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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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을 대접해 주는 문화가 굳건해 종손이 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그도 한때는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1972년 13대 종손인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모든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종손은 숙명적으로 집을 지킬 의무가 있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들도 내가 죽으면 집으로 올 거고. 장손자도 당연히 집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류 할아버지도 아쉬운 게 있다. 경제적인 문제다. 종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돈이 들어가는데 마땅한 수입이 없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종가의 경제적 기반이 토지였다. 해방 이후 토지 개혁을 실시하면서 종가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그래도 서애 종가는 나은 편이다. 제사 때마다 지손(친척)들이 알아서 돈을 갹출한다. 특히 서애 선생의 제사 때는 상당한 돈이 모인다. 지난해 들어온 부조액을 합쳤더니 300만원이 넘었다.
하회마을을 관광지로 개발해 얻는 수익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된다. 종가와 하회마을 전체를 관광 명소로 개발해 거기서 얻는 수익을 종가를 유지하는 데 쓸 수 있도록 했다. 관람료 수입 중 60%는 안동시가, 나머지 40%는 보존회가 갖고 보존회는 이 재원으로 종가 고위(남자 조상) 제사 때는 100만원, 비위(여자 조상) 때는 5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종가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결혼으로 인생을 선택한 종부의 부담이 만만치 않다. 류 할아버지도 “며느리는 쉽게 얻었는데, 장손자 결혼이 조금 걱정된다”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종부를 하겠느냐’고 묻자 서애 종부 최소희(81) 할머니는 “종부가 아니고 서애 종손 할 거야”라며 웃었다. 40년 가까이 서애 14대 종부로 살아온 할머니의 말에 여운이 남았다.
“제기 닦을 사람도 없지만, 조상님들 제삿밥 거르진 않을겨”
老종부의 고집 사계 김장생 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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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답 사이에 오롯이 서 있는 종택의 모습이 너무도 적막해 보인다는 말에 노(老)종부는 대뜸 이렇게 응수한다. 단아하게 빗어 올려 은비녀를 꽂은 쪽머리만큼이나 꼿꼿한 기개가 느껴지는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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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종택은 서울에 있었는데 고조부께서 일제 침략 때 모든 재산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어요. 염수재는 사실 사계 선생의 묘 앞에 지어 놓고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쓰던 집이죠.”홍 할머니의 큰아들이자 14대 종손인 김선원(63)씨의 설명이다. 공무원으로 연산읍장 등을 지내고 3년 전 정년 퇴임한 그는 문화해설사 자격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당시엔 인근에 다른 집들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떠나 폐가가 되다시피 해서 다 없앴어요. 곧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이 시작되면 좀 달라지겠죠.”덩그러니 남은 종택은 1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홍 할머니 혼자 막내 아들을 보살피며 지키고 있다. 막내아들은 지적장애인이어서 잠시도 떼어 놓지 못한다. 큰아들 내외도 함께 살았지만 직장과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30여 년 전에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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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림은 아직도 상당 부분 홍 할머니의 몫이다. 종부인 며느리는 10여 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아 몸이 불편하고, 의사인 손자와 약사인 손자 며느리는 웬만한 제사 때는 참석하기도 힘들다.“세 가지씩 놓던 편도 두 가지로 줄였어. 헐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해. 정성이 중요한 것이니 그게 흉 될 건 아니지. 놋그릇 닦아 줄 젊은 사람들 없는 게 지금은 더 문제여. 1년에 최소한 한 번 이상 장정 세 사람은 매달려 박박 닦아 줘야 하는디…. 제기를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모르겄어.”
10년, 20년 후엔 어떻게 될까. 홍 할머니는 “앞으로 돌아올 일을 워쩌케 다 예상하고 살겄어”라면서도 “설마 이만한 조상님이 집이 비게 놔 두실라고. 조상님들도 제삿밥 거르시진 않을겨”라고 말한다. 김씨도 “종손으로서 항상 사계 선생에게 누가 되지 않게 살려고 한다”며 “하지만 제례 형식은 시대에 맞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사계 선생의 뜻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종택은 박물관으로 양력 제삿날에 개관식
제사 대신 기념사업 오리 이원익 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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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 어른 계세요?”
“관장님요? 막 들어오셔서 안채에서 옷 갈아입고 계세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관장님’이란 호칭, 그래도 낯설다. 오리 선생의 13대 종부 함금자(69)씨는 좀 전에 돌담 너머로 본 충현박물관 관장이다. 종택과 오리 선생을 모셨던 충현서원 터 등 주변 유적들을 단장하고 유물 전시관을 더해 2003년 문을 연 사설 박물관이다. 유물 전시관을 운영하는 종가는 종종 있다. 그러나 이렇게 종택과 유적지 전체를 정식 박물관으로 만든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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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관장은 처음 연락했을 때 “취재할 게 없을 거예요. 전통은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다 없앤 것 같아서…”라며 방문을 완곡히 거절했었다. 4대 조상에 대한 기제사는 상당한 재산가였던 증조부가 일본·미국 등에서 유학한 아들(조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두 없앴다고 한다. 그런데 한식과 추석 등에 지내던 묘제와 오리 선생의 불천위 제사마저 함 관장 때 없애거나 간소화한 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오리 선생 생신인 음력 10월 24일 새벽녘에 지내오던 불천위제는 2003년 10월 24일 충현박물관을 개관한 뒤 이듬해부터 양력 10월 24일로 옮겼다. 그것도 2006년부터는 오전 10시로 늦춰 주과포회만 영당에 올려 기념식을 겸한 제를 지낸다. 손님들에게 별도의 식사 대접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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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결단이었다. 함 관장은 4대 독자인 종손 이승규(69·연세대 의대 명예교수)씨와의 사이에 아들만 넷을 뒀다. 그러나 더 이상 며느리들에게 자신과 같은 희생을 무작정 강요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함 관장은 그 연배의 종부로는 드물게 명문대 졸업생이다. 연세대 간호학과에 다니던 시절 남편을 만나 졸업 후 결혼했다. 전국 간호대생 모임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그는 결혼과 동시에 광명의 종택으로 들어가 몇 년을 살았다. 종부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종손 부부가 모두 세례교인인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함 관장은 “우리 부부는 제사를 우상숭배라 생각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추모의 예’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교적 이유로 제사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며느리의 태도를 억지로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괜히 지킬 수 없는 걸 지키려고 하기보다 대감 할아버지의 정신적 유지를 잇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어요. 남편이 산소들부터 정리한 것도 그런 의미죠.”
종손은 박물관의 운영 주체인 충현문화재단의 이사장이다. 이 이사장과 함께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오리 선생 묘를 찾았다. 하얀 눈꽃이 봄꽃의 화사함만은 못했지만 조경이나 관리가 제법 잘된 공원처럼 보였다. 80년대 초 경인고속도로 건설 때문에 이장 명령이 내려진 것을 계기로 이 이사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7대조까지의 산소를 모두 오리 선생 묘 인근으로 옮겼다고 한다.
유골을 모두 화장해 석함에 모신 뒤 비석이 없던 묘들은 나란히 모아 가족묘 형식을 취했다. 유물 가치가 있는 비석 등이 있는 묘는 가묘를 만들었다. 이 이사장은 묘를 이장할 때 겪은 고충을 털어놨다. “외국의 공원묘처럼 꾸며 보려고 했죠. 물론 종중에선 난리가 났었어요. ‘선조 묘를 그렇게 해서 얼마나 잘되나 보자’는 악담도 많이 듣고…. 그런데 요즘엔 구경하고 가서 그런 식으로 만드는 지손들도 생겼죠.”
묘터 소유권을 놓고 종중과 소송에도 휘말렸다. 결국 이 이사장이 승소했다. 이 이사장은 “대감 할아버지 유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일(재산 다툼)이 생길 수 있다고 내다보셨는지 유서 마지막 부분에 ‘적자와 적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토를 달지 말라’는 뜻을 밝혀 두 셨다”고 말했다.
그 후 묘터와 유적지 등은 모두 재단을 만들 때 기부했다. 사실 박물관 사업은 증조부가 마련해 둔 든든한 재산이 밑바탕이 됐다. 개관 준비에만 30억원가량 들었다. 의사인 한 아들에게서 “병원이나 지어주시지 뭐 하러 돈을 그렇게 쓰시느냐”는 볼멘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박물관을 관리하면서 매년 오리 선생 관련 유물이나 고서를 발굴해 연구하고 도록 등을 내는 데 연간 2억~3억원이 들어간다. 이자로도 운영이 될 수 있도록 기금을 만드는 게 종손 부부의 희망이다.
“다듬잇돌을 주제로 도록을 만들고 싶은데 마침 이번에 받은 대통령상 상금이 1000만원이나 되기에 좀 쓰마 했죠. 그런데 이이가 기금 종잣돈 만든다고 오늘 당장 재단에 입금시켰지 뭐예요.” 남편을 흘깃 쳐다보는 함 관장의 눈매엔, 그러나 흐뭇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검소하게 해도 제사엔 돈 많이 들어”
경제적 여유의 힘 고산 윤선도 종가
해남=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 제98호 | 2009012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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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로 들어간 윤씨는 한문으로 된 얇은 책을 꺼내들었다.'기대아서(寄大兒書)'였다. 고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해남 윤씨 집안의 가훈이나 다름없는 검소와 소박함을 당부한 글귀가 담겨 있다고 했다. 설 차례에도 그런 검소함이 배어 있다고 윤씨는 설명했다. “우리 집안은 예부터 복잡하고 요란하게 설 차례상을 차리지 않아요. 차례 모실 때 술과 함께 떡국과 반찬·산자·과일 정도를 차립니다. 제사 때와 달리 어육이나 육포를 내놓지 않는 것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차례상 차리는 방식입니다.”
해남 윤씨 종가에서 모시는 제사는 1년에 모두 25번이다. 고조부부터 부친 때까지 4대 봉사, 중시조인 어초은·윤효정 이후 직계 시제사가 17번, 그리고 어초은과 고산의 불천위 제사, 두 번의 명절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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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답 등 재산이 많지만 그것을 잘 지킨 덕이라고 말했다. “1984년도에 조부님 명의로 돼 있는 재산 중 상당 부분을 종중 명의로 다 바꿔 놓았습니다. 집안의 재산을 공공화시킨 거지요. 그래야 누가 함부로 팔거나 쓰지 못할 거 아닙니까. 후대까지 멀리 보고 그렇게 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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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는 종가의 살림살이를 물려받은 재산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인근 덕음산에서 다산 정약용이 산에 심어두었다던 차나무 종자를 얻어 16만5000㎡(5만여 평)의 다원(차밭)을 조성했다. 차를 재배하면서 그는 ‘해남다인회’라는 다도회를 만들었다. 매년 2000여 명의 전국 다인이 이곳 녹우당에 모여 차 문화상을 수여하는 행사를 열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발전했다.
윤씨는 2남2녀를 두었다. 그중 큰아들 윤성철(44)씨에게 종손 준비를 시키고 있다. 큰아들은 고려대에서 중문학을 배우고 중국 베이징대에서 공부를 하다 얼마 전 귀국해 서울에서 살고 있다. “아들이 귀국한 뒤 일부러 다른 일을 못 하게 말렸어요. 2010년부터는 녹우당에 내려와 본격적으로 종손 공부를 해야 하니까요. 이제 슬슬 종손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입니다.” 윤씨가 30대 초반부터 종손 역할을 한 것에 비하면 늦은 것도 아니라고 했다.
윤씨는 “정계에 진출하지 말고 혹 인연이 닿아 벼슬자리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고산 할아버님의 유언은 욕심을 버리고 자연 속에 파묻혀 종가를 지키는 후손들에게 언제까지 전해질 가르침으로 제례 때마다 마음속에 새긴다”고 말했다.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 볕이 드는 툇마루에서 윤씨의 부인이자 이 집안의 종부 김은수(72)씨가 설 때 쓸 제기와 놋그릇을 꺼내놓고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다과라도 좀 들고 가라”는 말로 손님을 맞았다.
종부 김씨는 본관은 김해고 고향은 경남 통영이다. 경상도 출신이 호남 명문가 종갓집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김씨는 고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시집온 후 3년 동안 종가에서 살림을 배웠다고 했다. 시집온 뒤 10년간 수첩에 메모를 해가며 종가 음식 만드는 법을 익혔다. 1년에도 수십 차례인 제사 덕에 그래도 빨리 익힌 편이란다.
윤씨는 종손 역할을 하면서 제사를 모시는 시간을 오전 1시에서 9시로 바꾸고 제사 횟수를 조정했다. 윤씨는 “원래 전통적으로 제사는 첫 닭이 우는 오전 1시에 시작하는데 참석한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시간을 앞당겼어요. 할아버지·할머니 제사를 함께 치릅니다. 횟수를 단축할 수 있고, 두 분이 함께 제사 음식을 드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싶었어요.” 고산의 종가도 세상의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血食君子’핏물 보이는 날고기 쌓기도
종가의 제사상, 특이한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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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각 종가에서 대대손손 가장 신경을 써서 모시는 불천위 제사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생물(生物)을 올리는 적(炙)이다. 생선·쇠고기·닭고기 등을 손질만 한 채 날것으로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기제사 때는 종가에서도 날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한국국학진흥원의 김미영 박사는 “옛날부터 제물의 가장 큰 의미는 ‘희생’이었다”며 “집단적으로 올리는 제례 때 ‘피’를 올리던 것이 사적인 제례에서 날고기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주자가례' 이전의 예서인 '예기'에도 ‘가장 숭상하는 제사에는 ‘(피)냄새’로 제를 올린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덧붙였다. ‘혈식군자(血食君子)’란 말도 있다. 그래서 대(大)유학자들을 모신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는 특히 이 원칙에 철저하다고 한다.불천위제는 그 집안에서 가장 존경하는 조상을 모시는 것인 만큼 날고기를 올리는 전통을 유지한다. 요즘엔 제례 후 함께 음복하기 위해 익혀 올리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특히 안동지역에서는 지금도 날고기를 사용한다.
날고기를 올릴 때도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방에서는 어적·육적·계적을 따로 올리지 않고 한꺼번에 쌓아올린다. 이를 ‘도적’이라고 한다. 김 박사는 “'주자가례'에는 ‘삼적’을 따로 내도록 제시돼 있는데,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한 틀에 한꺼번에 높이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땅이 비옥해 살림이 풍족했던 호남지방은 날고기를 사용하는 적은 따로 내고, 예전에는 귀했던 기름에 지진 각종 전을 높이 쌓아올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김 박사의 견해다.
일반 기제사에서도 적이나 전·탕 등은 대개 세 종류의 고기로 만든다. 어류와 육류·조류 세 가지를 갖추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한꺼번에 쌓을 때는 위에서부터 ‘깃털-털-비늘[羽毛鱗]’ 달린 짐승 순서다(문어를 올릴 경우 쌓기 힘들어 맨 위에 놓는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늘-땅-바다로 구성된 우주에서 왔다는 뜻이다.
영남지방에서는 상어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돔배기’나 고래고기를 어적으로 올리기도 한다. ‘치’자가 들어간 생선류는 절대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종가도 있다. 경북 경주의 양민공 손소 종가는 계적으로 수탉을 통째로 삶아 놓는 것이 특이하다. 머리와 닭발을 잘라내지 않고 몸 전체를 사용하며, 닭 형태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30㎝ 정도 되는 대꼬지로 머리가 꼿꼿이 서게끔 받쳐 삶는다.
또 하나 제사상에 공통적으로 올라가는 음식 중의 하나가 식혜다. 원래 예서에 나와 있는 식혜는 우리가 요즘 먹는 것과는 다른 음식이다. 밥을 엿기름에 삭혀 달착지근하게 만든 음료수가 아니라, 밥을 새콤하게 약간 발효한 것이다. 물론 요즘엔 대개 음료수 식혜를 만든 뒤 밥알만 건져 올려 놓는다. 고명으로 대추 저민 것이나 북어포·육포 등을 조그맣게 잘라 올리는데 특별한 유래는 없다.
이 밖에도 지역 특산물이나 조상의 생전 기호에 따라 올려 놓는 음식이 많다. 죽전 박광정 종가 등 전남 지역에서는 벌교 특산물인 꼬막을 제사 음식으로 많이 사용한다. 장성군의 하서 김인후 종가에서는 꼬막을 ‘해과(海果)’로 여겨 과일열에 놓기도 한다. 남해안과 인접한 호남 종가에서는 꼬막과 유자 외에도 경상도나 경기도 등에서는 포로 잘 사용하지 않는 상어포를 볼 수 있다.
‘비자강정’은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종가만의 독특한 제사 음식이다. 고택 뒤 산자락에는 직경 1m에 300년 이상 되는 비자나무 5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이 비자나무 열매가 강정의 주재료다. 비자의 독특한 향과 쌉싸래한 맛이 달달한 강정과 잘 어우러진다. 비자강정 제조법은 이 집안 종부들에게만 전수되는 비법이라 한다.
경북 성주의 응와 이원조 종가에는 응와 선생이 생전에 즐겼다는 ‘집장’을 해마다 불천위 제사상에 올린다.
곱게 빻은 메줏가루에 찹쌀풀·간장·조청을 넣어서 버무린 다음, 소금에 절인 가지·박·고추·부추 등의 야채를 박아 만든 음식이다. 항아리에 담아 종이·짚·솔가지·겨 등을 이용해 24시간 동안 불을 피워 띄우는, 보기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음식이다.경북 봉화의 충재 권벌 종가에서는 편을 올릴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루떡 대신 ‘골비떡’이라고 부르는 작은 크기의 절편(잔절편)을 사용한다. 어른 새끼손가락 크기의 잔절편을 반으로 접고 비벼서 올챙이처럼 만든 것이다. 편편한 시루떡에 비해 골비떡을 높게 쌓아올리려면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하다.
안동 하회마을의 서애 류성룡 종가에서는 ‘중개(仲介)’라는 일종의 유과를 불천위제 때마다 올린다. 궁중의 중박계(中朴桂)가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 중개는 서애 선생의 생존 당시 기호음식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사상에서 술을 또 빼놓을 수 없다. 대구의 한훤당 김굉필 종가의 전통 가양주는 국화주다. 섣달에 담가 정월 제사에 쓴다. 정원에서 직접 재배한 황국을 재료로 하여 담고, 장독대에는 국화주 전용 항아리도 있다. 이 종가는 화전에도 독특하게 장미꽃을 사용한다. 화단에 노란 장미꽃을 심어놓고 가을 제사 때 쓴다.
[2009 종가 이야기]500년 세월 차례상 변했어도 '우리 할아버지'그대로
설을 맞아 ‘민족의 대이동’은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됐습니다. 설 차례는 가족의 뿌리인 조상들에게 올리는 새해 첫 인사입니다. 설을 앞두고 중앙SUNDAY가 ‘명문 종가’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16, 17세기 조선이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궁금해서입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종손·종부로서의 책임감은 여전히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제례를 포함한 뿌리를 지키는 방식은 21세기에 맞게 변하고 있었습니다(사진은 점필재 김종직 종가에서 기일을 맞아 집안 어른이 축문을 쓰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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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전국의 명문 종가(宗家)들을 찾아다니며 조사했던 최숙경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종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떡 벌어진’ 제사상이다. 그래서 차례상도 일반 가정보다 더 잘 차릴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오해란다. 보통 떡국을 먹을 때 반찬 수를 밥과 국을 먹을 때보다 적게 하듯, 종가의 설 차례상도 술과 떡국, 포, 적, 전, 김치, 과실 등 ‘기본’ 차림새만 지킬 뿐 가짓수는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즉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야말로 종가의 가장 큰 책임이다. 세상이 변했다지만 요즘도 우리나라 종가들은 집에서만 1년에 평균 14회쯤 제사를 지낸다. 한 달에 한 번 이상꼴이란 얘기다. 묘에 찾아가 지내는 묘제(시제)를 포함하면 20회가 훌쩍 넘는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완간한 『종가의 제례와 음식』시리즈 16권에 소개된 종가들의 제례를 분석한 결과다.
종가란 큰아들[嫡長子]에게 대를 잇게 하는 중국 주나라의 종법제에서 유래됐다. 조선 중기 전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순권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15세기만 해도 제사를 외손이 지내기도 했다”며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재산 상속이나 제사 등 모든 것이 ‘큰집’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인 제사에는 부모에서부터 고조부모까지 4대 조상에 대한 기제사와 함께 설과 추석 차례, 묘소에 가서 지내는 묘제 등이 있다. 명문종가엔 불천위(不遷位)조상 내외에 대한 제사도 추가된다. 불천위란 학식과 덕망이 높아 사당에서 신위를 없애지 않고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나 유림이 인정한 것을 말한다. 많은 종손과 종부가 ‘우리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무한한 존경과 자부심을 보이는 바로 그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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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위께 두 번째 올리는 술잔을 뜻하는 ‘아헌(亞獻)’의 경우『주자가례(朱子家禮)』 등에 주부가 하는 것으로 적혀 있다. 실제로 경북 안동의 보백당 김계행 종가 등에서는 종부가 두 번째 잔을 올린다. 그러나 같은 영남지방이라 해도 대구의 한훤당 김굉필 종가는 다르다. 여자들은 음식 준비만 할 뿐 제사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제사 음식의 종류나 가짓수도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불천위 조상이 생전에 제사 음식의 종류 등을 직접 정해 간소화할 것을 당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리 이원익의 4대손인 이존도는 “나를 제사지낼 때 제수의 경우 유과는 이미 쓰지 말라고 했고, 약반·밤·차는 식성이 평소 즐기지 않았으니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실학파 학자였던 서계 박세당도 자신의 제사상에 음식이 15가지를 초과하지 말고 떡은 큰 제사에 쌀 4되를 쓰라는 등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지난 수백 년보다 최근 10~20년 동안의 제례 변화가 훨씬 더 크다. 기일 전날 밤부터 상을 준비해 새벽에 지내던 제사를 오전 9시 이후 등으로 늦춘 종가나, 정부에서 권장했던 대로 신정에 차례를 지내는 종가, 묘제를 양력으로 지내는 종가도 있다.
무엇보다 종가 제례의 변화를 강요하는 요인은 일손 감소와 경제적 부담이다. 어쩔 수 없이 상차림을 간소화하거나 직접 음식을 만들지 않고 상품을 구입해 이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몇 년 전까지 종부의 자리가 비어 있었던 퇴계 이황 종가에선 100여 명이 참가한 묘제 후, 종손과 연세 많은 제관들을 제외한 손님들은 각자 식판을 들고 ‘셀프 서비스’로 비빔밥을 받아 식사하기도 했다.
여기에 종손들의 ‘세대 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젊은 세대는 ‘전업 종손’이 되는 것 자체를 꺼린다. 이들은 살기도 불편한 ‘종택 지킴이’ 역시 원하지 않는다.
김경선 성균관 석전교육원 교수는 “시대가 급변하고 있어 종가의 삶이나 제례도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다만 어떤 식으로 바뀌는 것이 나을지 판단하기 어려운 과도기”라고 말했다.
그는 “70년대 초 가정의례준칙이 나왔을 때만 해도 반발이 심했는데 그 후 불과 20년도 못 돼 ‘굴건제복’을 입거나 3년상을 하는 상주는 뉴스감이 될 정도가 됐다”며 “시간이 이런 혼돈을 정리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