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金洙暎 1921 ~ 1968)
1921.11.27 서울 관철동 출생.
선린상고 졸업.1941년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 입학.
1943년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
1944년 가족과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 길림 제육고에서 교편생활.
광복후 귀국. 서울에서 통역 일을 하다, 연희대(延禧大) 영문과 4년에 편입(1945)했으나 중퇴.
1968. 6.16 교통사고로 사망.
◆약력
▦1921년 서울 출생 ▦연희전문 영문과 중퇴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펴낸 모더니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시 2편 수록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행 ▦1960년 4ㆍ19혁명 적극 지지, 참여시로 시풍 변모 ▦1968년 평론가 이어령과 ‘순수-참여 문학’ 논쟁, 6월 교통사고로 사망 ▦1981년 <김수영 전집> 간행 ▦200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해설 - 첨단과 정지의 변증법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풀’은 중요한 해석적 성과들을 많이 얻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듯하다. 이에 나름의 해석 하나를 제시해 보려 한다. ‘풀’은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이 균열과 모순을 안은 채 결합되어 있다. 이 두 구조 사이의 관계는 ‘풀’ 뿐만 아니라 김수영 시 전체의 비밀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먼저, 표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대립 관계이다. 구체적인 근거는 일곱 번 반복되는 ‘보다’(비교격 조사)와 두 번 등장하는 ‘더’(강세 부사)이다. ‘바람’은 가해자이고 ‘풀’은 피해자이자 극복자인 듯이 보인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대립(부정/긍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바람’을 ‘외세’ 혹은 ‘독재자’로, ‘풀’을 ‘민중’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풀’의 속성과 운명은 시의 공간에 내면화되어 존재의 정신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확장을 보여준다. 따라서 ‘풀’은 민중이나 시인을 포함한 존재 전체, 혹은 역사적 ‘주체’를 상징하고, ‘바람’은 이 ‘주체’에 가해지는 ‘바깥의 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내면 구조를 살펴보자. ‘풀’과 ‘바람’은 호응 관계이다. 숨은 구조가 은연중에 노출되는 지점은 1연의 ‘나부껴’(고통이 아닌 즐거움을 표현하는 동사)이다. ‘비’와 ‘동풍’은 ‘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물’과 ‘운동성’을 부여한다. ‘풀’은 ‘물기’를 머금어야 잘 자라며(따라서 ‘운다’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에 흔들려야 뿌리를 튼튼히 만든다(따라서 ‘눕는다’도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바람’은 은총을 베푸는 자이고 ‘풀’은 수혜자가 된다.
이 관계는 ‘눕는다→일어난다’ ‘운다→웃는다’를 하나의 진행과정으로 해석하는 것과 연결된다. ‘풀’은 울어야 웃을 수 있으며, 누워야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풀’은 ‘주체’를, ‘바람’은 다른 세계에서 불어오는 ‘탈주체의 무의식적 잠재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이 다른 시 ‘절망’에서 말했듯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풀에게,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듯이 바람의 구원이 밀려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풀’은 표면 구조를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내면 구조를 함께 살펴야 이 시가 주는 ‘은밀한 공감’이 해명될 수 있다. 그런데 표면 구조와 내면 구조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전자는 주로 참여시(민중시)의 관점과 관련되고, 후자는 순수시(실험시)의 관점과 관련된다. ‘참여/순수’의 이분법이 횡행하던 1960년대의 시단에서, 이 모순을 내포한 채 그것을 한 몸(시)에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것이 김수영의 시도였고, 이 시도가 농축되어 마지막 작품 ‘풀’에 녹아들었다.
그리하여 순수와 참여, 첨단과 정지, 해탈과 풍자 사이의 간극을 자신의 몸(시)으로 메우려 한 노력이야말로 김수영이 한국시에 남기고 간 중요한 자취이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혹은 시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한 김수영의 시적 추구는 모순과 균열을 안은 채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교훈을 준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공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1945>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라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953>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1957>
그 방을 생각하며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狂氣---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殘滓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1960. 10. 30>
거대한 뿌리
나는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 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팔·일오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사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일팔구삼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궁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는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입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삼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지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시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964. 2. 3>
병풍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向)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960. 6. 15>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1965. 11. 4>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 10. 5>
사랑의 변주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사·일구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면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꽃 잎(一)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革命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1967. 5. 2>
기 도
-사일구순국학도위령제에 부치는 노래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革命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쟝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쥐가 되고 삵괭이가 되고 진드기가 되더라도
이번에는 우리가 악어가 되고 표범이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더라
도
이번에는 우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여우가 되고 수리가 되고 빈대가 되더
라도
아아 슬프게도 슬프게도 이번에는
우리가 革命이 성취하는 마지막날에는
그런 사나운 추잡한 놈이 되고 말더라도
나의 罪있는 몸의 억천만개의 털구멍에
罪라는 罪가 가시같이 박히어도
그야 솜털만치도 아프지는 않으려니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1960. 5. 18>
활동 및 작품경향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
1949년 김경린(金璟麟), 박인환(朴寅煥)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 모더니스트로 각광 받음.
1950년 6.25 발발 후 피난을 못한채 북한군에 징집, 포로가 되었다,
1952년 거제도 수용소에서 석방 됨.
1954년 주간 태평양, 평화신문에서 근무, 1955년 이후 자택서
양계(養鷄)업을 하며 시작(詩作), 번역, 평론에 전념.
1950년대 :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 대표작 : <헬리콥터>, <폭포>, <눈>등. 1959년 그간의 발표작을 모은 시집 <달나라의 장난> 간행 및 제1회 시협(詩協)상 수상
4.19혁명 : 시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 대표작 :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냄. 그는 지속적으로 사랑과 자유를 주제로 하는데, 자유는 그의 시적, 정치적 이상이고,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인 사랑이다.
5.16 이후 : 군사정권 득세 이후,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敵)'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연민, 탄식, 풍자 등을 작품화. 대표작 :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 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썼고,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 그 외 <시여, 침을 뱉어라>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
사후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 몇 권의 시선집과 산문집 발행. 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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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야기]
현실의 장벽을 향해 던지는 칼빛 언어, 자유의지
김수영은 '자유'의 시인이다.
그는 돌에서 피를 뽑아 낼 정도의 치열한 자유의지로 우리 근대사의 뼈아픈 역사와 삶의 생채기를 온몸으로 껴안은 시인이다. 따라서 자유란 테마는 그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끈질긴 탐구의 대상을 이룬다. 이런 자유의 정신으로 벼려진 칼빛 언어에는 시적 진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김수영의 혹독한 자기 수련(修鍊)이 아로새겨져 있다. 결코 현실의 장벽에 굴복하지 않는 도저한 자유의지는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로 그려지곤 한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바뀌어진 지평선'). 삶의 자유로운 비상을 억압하는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돌, 무엇을 치어 받으려고 그토록 가열하게 날아가는가. 세상에 배를 밀착하고 날아가는 강인한 정신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그가 말하는 자유란 현실의 한계를 단박에 뛰어넘어는 '초월(超越)'의 희열이 아니다. 현실의 아픔과 상처, 갈등과 고통 위를 온몸으로 밀며 나가는 기어넘기, 즉 '포월(匍越)'이자 그 생채기를 안고넘는 '포월(抱越)'의 산고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자유, 그 반역의 정신은 좌절의 쓴맛과 직결된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자유//―비애"('헬리콥터'). 헬리콥터는 곤고한 지상과 결별하며 이륙할 수 있는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이나, 종래에는 어딘가 착륙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비애가 병존한다. 이런 시적 모반의 정신이 극단에 이르면 그의 시는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며 혁명을 꿈꾼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반항의 정신이 돛을 올리는 순간이다. 4·19 혁명 직전에 발표한 '하……그림자가 없다'와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가 그 대표적인 시라 하겠다. 그의 이러한 문학 정신은 소위 말하는 '반시론(反詩論)'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전복을 꿈꾸는 모든 전위 문학은 긍정이 아닌 부정의 정신을 근간으로 해야만 한다는 그의 헌걸찬 주장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여! 일상의 안일과 나태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그대들이여! 지금 어떤 모반의 전략을 꿈꾸고 있는가? 도대체 꿈꿀 수 있기는 한가? (류신/문학평론가)
김수영은 왜 우는가 - ‘명동백작’을 아는가
김수영은 왜 우는가
‘명동백작’을 아시는지. 1950년대 문화인들의 삶을 극화한 교육방송(EBS)의 한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나는 ‘명동백작’의 팬이었다. 주말의 늦은 밤이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명동백작’을 보곤 했다. 이 방송의 시청률이 대략 1퍼센트 전후였다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명동백작’의 시청자들은 나와 같은 골수팬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컬트 무비’라는 것이 있다. 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 영화에 열광한 나머지, 영화를 보는 일이 마치 신성한 제의와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때, 그것을 컬트 무비라 일컫는다. 내게, 혹은 나와 비슷한 열정으로 ‘명동백작’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그 드라마는 그런 열광적인 관극 체험을 가능케 했었던 것 같다.
‘명동백작’ 때문에 나는 내가 존경하는 두 분과 원치 않는 뜨거운 논쟁을 한 적도 있다. 그 두 분들 역시 그 프로그램의 골수팬이었던 까닭이다.
첫 번째 논쟁은 이런 것이었다. ‘명동백작’은 1950년대 문화인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명한 작품인데, 자연히 거기에는 당시로서는 평균적이라 할 수 없을 문화인들의 일상도 잘 조명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다방문화’라는 것이다. 1950년대라면, 한국전쟁 직후의 그야말로 ‘폐허’와도 같은 현실이 지배적이었을 터인데, 그 드라마 속의 문화인들은 기껏해야 ‘다방’에서 시가 어떠니 문학이 어떠니, 그렇게 커피나 술을 마시며 떠들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그들을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 존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존경하는 사회학자인 한 선배의 항변이었다. 그 선배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당시의 평범한 시민들은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는데 말이지!”
일리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생존의 기반 자체가 험악한 상황에서, 가령 시인 박인환 식의 ‘버지니아 울프’를 읽거나, 또는 ‘목마를 타고 간 숙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현실의 편에서 보면, 철딱서니 없는 몽상이자 현실에 대한 무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문화인들이 그 험악했던 ‘시민’들의 악다구니의 삶과는 전혀 다른 중산층의 삶을 살았냐 하면, 역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화인들에게도 1950년대의 평균적인 궁핍은 동일한 조건이었다.
물론 가령 이승만이나 이기붕 등의 문민 독재권력에 야합하여 호가호위한 문화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개는 시인 김수영의 경우처럼 생존의 벼랑 끝에서도 오히려 ‘자유’나 ‘혁명’과 같은, 인간성의 좀더 높은 경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문화인들은 그것이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이상주의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의 고통을 방기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상황의 고통을 뛰어넘어 더욱 완전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희구하는 ‘꿈꾸는 존재’로서의 본능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두 번째 논쟁은 시인 김수영에 관한 것이었다. 왜 이 드라마 속의 시인 김수영은 그렇게 히스테릭하게 그려졌느냐는 것이다. 김수영 뿐인가. 화가 이중섭이 그러하고, 시인 박인환과 김관식 역시 그런 문화인으로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내게 던졌던 존경하는 친구에게, 드라마 속의 김수영은 히스테릭한 것이 아니라 지금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치부 기자인 한 친구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도대체 김수영은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김수영의 울음은 두 차원의 대답을 준비하게 만든다. 첫 번째 차원의 대답은 1950년대라는 시대적 성격에 힌트가 있다. 시인 김수영을 보더라도, 그는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생활을 했고, 석방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레드 콤플렉스’로 고통 받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체험은 ‘인간’을 이념에 희생된 동물의 차원으로 하강시켰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었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이 그 ‘한 줌의 이념’ 때문에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죽였던 전쟁의 체험은 민족 전체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김수영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두 번째 대답은 예술가가 꿈꾸는 자유의 속성이란 비타협적인 완전성에 있는데, 1950년대라는 상황 속에서 이런 꿈은 처절한 몽상에 불과했다는 점에 있다. ‘평화통일’을 외치는 일조차 용공으로 내 몰려 죽임을 당했던 것이 1950년대라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 안에서 예술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완전하고 비타협적인 예술적 자유는 질식상태에 처한 것이다. 그러니 김수영은 4.19 전후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명동백작’의 1950년대가 아니라, 21세기의 이 시간대에 김수영이 다시 살아온다면 그는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현실을 긍정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지구화의 시대라고 많은 사람들이 떠들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의 이념 시계는 아직도 1950년대라는 과거에 멈춰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은 대륙과 연결된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상상지도 속에서는 휴전선 이남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 것이다.
이 ‘정신의 섬나라 근성’을 제도적으로 강제하고,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삼대에 걸쳐 대물림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시대착오다. ‘명동백작’에서의 김수영의 눈물은 21세기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제 시계를 21세기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 김수영의 눈물이 멈출 수 있다.
이명원(문학비평가)
사랑의 변주곡(變奏曲)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김수영, 하이데거를 읊다
시인 김수영(金洙映·1921~1968)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 구절이었던 ‘병풍’(1956)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육칠옹해사’는 바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Heideg ger·1889~1976)를 지칭하는 암호와도 같은 단어였다는 해석이 나왔다. 김유중(金裕中) 항공대 교수(국문학)는 최근 낸 단행본 ‘김수영과 하이데거―김수영 문학의 존재론적 해명’(민음사)를 통해 이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육칠옹해사’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60~70 정도 나이로 바닷가에 숨어 사는 선비’ ‘병풍에 찍힌 도장에 새겨진 인명’ 정도였다. 김유중 교수는 이에 대해 ▲‘병풍’의 내용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죽음에 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병풍’이 쓰여진 1956년은 하이데거가 정확히 67세가 되는 해이며 ▲하이데거의 중국어 표기가 ‘해덕격(海德格·hai de ge)’인데 셰익스피어를 ‘사옹(沙翁)’, 톨스토이를 ‘두옹(杜翁)’이라고 지칭했던 관례에 비춰볼 때 김수영이 하이데거를 ‘해사(海士)’로 표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나아가 김수영의 문학사상이 하이데거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가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반박하고 인간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하고,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므로 인간은 항상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반성하며 삶의 매 순간을 소홀히 보낼 수 없게 된다고 했는데, 이런 하이데거 죽음론(論)의 핵심이 들어있는 대표적인 시가 바로 ‘병풍’이라는 설명이다.
제1행의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는 진술은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현존재가 내뱉듯이 하는 말”이며, 2행의 ‘등지고 있는 얼굴’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는 모습이다.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는 행은 결국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인식’을 통해 죽음이 삶의 단절이라는 인식을 극복하고 삶의 생산적 의미를 찾는 실존적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김유중 교수는 “하이데거가 김수영 문학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 후기 문학에서만 거론됐거나 무시됐지만, 초기 작품인 ‘병풍’에서부터 이미 이 같은 사상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 철학 전공자인 구연상 박사는 “하이데거와 김수영의 관계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원고료 받아 온 남편, 내게 주먹질 하길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초여름 밤에 들이닥쳤다. 귀가하던 남편이 버스에 치여 병원에 실려갔다고 옆집 사람이 달려와 전했다. 1968년 6월16일 시단(詩壇)의 큰 별 김수영(金洙暎·1912~1968)은 맨발로 뛰어간 아내 앞에서 그렇게 졌다.
시인의 문학세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내는 왜 덜 다듬어진 작품을 공개했을까. 27일 김씨가 사는 경기도 광주를 찾았다. 김씨는 시인의 육필 원고와 노트가 들어있는 커다란 반닫이를 열어 보이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분만이 문학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시인(남편을 지칭)은 인생 전부가 시였어요. 생활이 시고, 시가 생활이었죠. 김 시인을 후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미완성작도 있고 발표하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것 때문에 김 시인이 비하될 것도 없잖아요."
반닫이 안에는 시인의 꼼꼼한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노트와 메모가 가득했다. 손으로 깨끗하게 베낀 T.S. 엘리어트와 W.H. 오든의 작품도 보였다. 서라벌예대와 서울대 영문과에 출강할 무렵, 강의 자료로 쓰던 노트라고 김씨는 말했다. 일부 노트는 바래져 손만 대도 가장자리가 떨어져 내렸다. 방 한쪽 벽에는 교과서에 실려 더 유명해진 마지막 작품 '풀'의 육필 원고가 유리 액자에 담겨 걸려있다.
이번에 공개된 작품 중 '김일성 만세(金日成 萬歲)'(1960)는 이념적 금기어를 직설적으로 담아 논란을 불렀다. 김씨는 "김 시인은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시는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일 뿐, 공산주의 찬양과는 거리가 멀어요. 김 시인은 절대적인 자유주의자였어요. 공산당과 호흡을 맞출 수 없는 사람이죠."
문학소녀였던 김씨는 고등학생 때 김수영을 만났다. 여섯 살 차이 나던 시인을 김씨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40년 전 장례식 때, 김씨는 시인의 관(棺)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책을 함께 묻었다.
"김 시인이 워낙 철학 책을 좋아했어요. 내가 하이데거 전집을 사줬는데,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읽었어요. 그래서 그중에 한 권 '존재와 시간'을 넣어줬지요. 좋아하는 거, 나 떠나서도 실컷 읽으라고."
시 한 편에 3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김씨는 양계(養鷄)와 바느질삯으로 한 달 생활비 2600원을 벌었다. 1949년부터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혼하자는 말도 나오고 별거도 했다. 그러나 '예술과 밥'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인에게 받은 '벼락같은 감동'이 김씨를 지탱했다.
"한번은 싸구려 대중잡지에서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이 왔어요. 원고지 70장짜리였는데, 원고료가 대두 한 말 값일 정도로 후했어요. 김 시인이 나보고 쓰라는 거야. 물론 이름은 가명으로 하는 거였고. 그 정도야 하룻밤이면 뚝딱이지. 아침에 원고를 건네주면서 원고료 받아오라고 시켰는데,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와서는 다짜고짜 주먹질을 했어요. '더러운 년, 나쁜 년' 하면서. 알고 보니, 원고료 받으려고 잡지사에서 기다리다 그 소설을 읽었는데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거야. 내가 미워 죽겠더래요. 다음 날 아침에 해장국 들이밀고 방에서 나오려는데, 내 발목을 턱 잡았어요. '우리 그런 거 써서 밥 먹고살지 말자. 굶는 게 낫겠더라.' 그 말을 들으니, 두들겨 맞았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1960년대 들어 김수영에게 시 청탁이 줄을 잇고 번역일이 밀려들면서 생활이 안정됐다. 식모도 둘 정도로 여유를 갖게 되자 김씨는 '이혼 선언'을 했다.
"그만큼 살림을 일궈놓으니까 내가 지치더라고. 나도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돈은 필요 없고, 몸만 나갈 테니까 그만 살자고 했지. 크게 놀라진 않더라고. 생각해보겠다 하더니, 일주일 만에 '그럴 수 없다'면서 나를 잡았어요. '내 시는 나 혼자 쓰는 게 아니다' 그러더라고."
김수영이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박인환을 질투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김씨는 "질투한 것이 아니라 경멸했다"고 말했다. "멋만 부릴 줄 알지 시를 쓸 줄 모른다고 무시했어요. 유치환, 조지훈, 모윤숙도 안 좋아했어요. 관념만 잔뜩 들어있다는 거지."
김씨는 요즘도 김수영의 작품을 꺼내 읽으며 새로운 감동을 받는다. "김 시인은 산문도 조각 같아요.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최고다' 하는 생각이 솟아나요.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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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인이 우리집 바깥 길가에서 휘파람을 불어요.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잘 따라 불렀어. 조바심이 나서 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 그래서 몰래 구두 갖다 놓고 또 이쪽으로 오버코트 갖다놓고…. 이런 식으로 기어이 나가서 만나곤
했지요."
"시여 침을 뱉어라"며 엄정한 시정신을 추구했던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부인 김현경(金顯敬·81)씨가 회상한 시인과의 연애시절 한 장면이다. 올해로 시인의 40주기를 맞아 시단에서 '김수영 르네상스' 현상이 일고 있는 가운데
부인 김씨가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명지대 문창과)와 대담을 갖고, 시인의 개인사에 얽힌 일화들을 상세하게 털어
놓았다. 이 대담은 이번 주 나올 계간지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린다.
김수영 시인과 부인 김씨는 6·25 전쟁에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끌려나가고 종전 후에는 한 때 별거를 하는 등 거센 풍파를 겪었지만 그 후 시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신 교수는 "김수영 시인은 자신의 생활에서 소재를 따온
일상시(日常詩)를 많이 썼다는 점에서 부인의 증언을 통해 공개된 내용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의용군 집단 사살 현장에서 살아 돌아와 부인 김씨는 6·25 전쟁중 김 시인이 의용군으로 입대하게 된 계기에 대해 "길에서 붙잡혀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김 시인의 의용군 입대에 대해서는 그간 자원입대와 강제 징집 사이에 논란이 있어 왔다. 부인 김씨는
"내가 만들어 준 셔츠를 입고 외출한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수소문 끝에 서울 일신초등학교에 수용된 것을 알고
감자를 한 보따리 삶아 찾아갔다"고 회고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던
김 시인이 살아 돌아온 사실은 그간 '탈출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가 그녀의 증언을 통해 이번에 세밀하게
드러났다.
'큰 구덩이에 세워놓고 빵(집단사살)해버렸는데… 어느 순간 자기도 쓰러졌는데 자기 위로 팍팍 시체고 사람이고 겹쳐지면서 쌓이더라.… 어떻게 해서든 죽은 시늉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그러고 있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해 넣은 틀니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김수영 시인은 단순하게 반복되는 생활을 못 견뎌 했다. 부인에 따르면, 서울로 돌아왔다가 경찰에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시인은 야전병원장 통역관으로
일하며 일상이 안정되자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드니까 이를 하나씩 뺐다"고 증언했다.
김 시인은 훗날 부인에게 "너무너무 자극이 필요하다. 뭐가 아프든지, 뭐가 쓰리든지, 뭔가
통증이 나를 일으킬 것 같았다"는 말로 생니를 뽑아가며 견딘 수용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폭음과 틀니 분실사건 김 시인은 술에 취하면 틀니를 빼서 손수건에 싼 뒤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부인은 시인이 만취해 돌아온 날이면 주머니에서 틀니부터 찾아내 컵 속에 넣어 둔다. 1960년대 초의 어느 날, 평소처럼
주머니를 뒤졌는데 틀니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어디서 술 잡수셨어?" 하고 물었더니 시인은
"무교동에서 먹고 청진동에서 먹고 광화문이 마지막"이라며 화를 냈고, 부인은 그런 남편을
살살 달래 술집을 시간 순서대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어느 술집 들통 속에 빠진 틀니를
찾아내 닦아서 끼워줬더니 시인이 아주 좋아했다고 부인은 기억한다.
◆별거와 재결합 부인 김씨는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선배이자 영문학자인 이모씨(작고)와 자신이 잠시 동거한 사실을 두고 떠도는 풍문에 대해서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 있는 시인을
찾아갔던 그녀는 일자리를 알아본다며 평소 안면이 있던 이씨를 만나러 갔다. 부인 김씨는 그러나 당시
40대 노총각이었던 이씨의 집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 두 사람이 살던 집에 김 시인이 나타나 부인 김씨에게
"가자"고 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시인에게 돌아온 것은 2년이 더 지난 뒤였다. 김씨는 (이혼하기 위해)
김 시인의 도장까지 받았지만 "이러다가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고, 재결합을 결심한 뒤
서울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다. 부인은 재결합하던 날의 상황도 증언했다. "삼선교 어디에서 5시쯤
만나자"고 엽서를 써 보내자 시인이 '이발을 깨끗하게 하고 딱 나와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그냥
삼선교를 빙 두 바퀴 돌고 그날 밤 이후 다시 부부로 같이 살기' 시작했다.
부인 김씨는 대담에서 김 시인이 "술을 무지무지하게 먹고 들어오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길에서 이○○를 만났다든지 하는 자극이 있는 날"이라는 말로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부인은 또 "1년에 한두
번 무지무지하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내가 꼭 냉수를 떠다 줬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온 뒤 "시인과 밤을 새가면서 얘기를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남편에게 "시인 중의 시인, 최고의 시인"이라고 말해주면 김 시인이 아주 좋아하며 "나는 인류를 위해서 시를 쓰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인으로서의 남편에 대해서도 나름의 평가를 내렸다. "똑같은 기분으로 절대로 시 두 편을 안 써요. 그리고
곱게 쓰는 것도 싫어하고." 아내가 "어머 이거 참 좋다"고 하면 시인은 일부러 더 거칠게 시를 만들어서 대중성을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왜 이렇게 어려워요?"라고 물으면 "내가 좀 덜 됐지"라며 난해하다는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김현경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지금도 남편이 남긴 시 원고를 보면 가슴이 뜨겁고 이런 대 시인과 살았다는 것이 흐뭇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시인이 쓰던 물건은 재떨이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며
"1980년대 초에 충북 보은 속리산 자락에 집을 사 둔 것이 있는데 이곳에 생전에 시인이 사용하던 그대로
서재를 복원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
고 김수영 시인의 시 ‘아침의 유혹’이 새로 발굴됐다. 이 시는 6·25전쟁 직전에 쓰인 것으로 후기의 현실참여적·사실적 경향과 달리 모더니즘 경향이 강했던 고인의 초기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은 이 시를 포함, 총 176편을 남겼는데 6·25 이전의 시는 9편에 불과하다. 1981년 ‘김수영전집’(시·산문 2권)을 처음 발간했던 민음사는 최근 개정판 작업도중 ‘자유신문’ 49년 4월1일자 2면 좌층 중앙단에 게재된 ‘아침의 유혹’을 찾아냈다고 2일 밝혔다. 이 시는 전집발간에 참여했던 고인의 여동생 김수명씨의 작업노트에 있는 메모를 근거로 국회도서관·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영인본과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확인됐다. 오는 5일 발간 예정인 ‘김수영전집’ 개정판에는 ‘아침의 유혹’ 이외 지난해 발굴된 시 ‘판문점의 감성’과 산문 17편이 추가됐다.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아침의 유혹’-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산림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서울역에는 화환이 처음 생기고 나는 추수하고 돌아오는 백부를 기다렸다 그래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지무지한 갱부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것은 천자문이 되는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스푼과 성냥을 들고 여관에서 나는 나왔다 물 속 모래알처럼 소박한 습성은 나의 아내의 밑소리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교과서에도 질투의 ○○(판독불가능)은 무수하다 먼 시간을 두고 물 속을 흘러온 흰 모래처럼 그들은 온다 U·N위원단이 매일 오는 것이다 화환이 화환이 서울역에서 날아온다 모자 쓴 청년이여 유혹이여 아침의 유혹이여
풀
풀이 눕는다 <1968. 5. 29>
공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1945>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1953>
눈
눈은 살아 있다.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1957>
그 방을 생각하며
革命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1960. 10. 30>
거대한 뿌리
나는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내시, 외국인의 종놈, 궁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병풍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1960. 6. 15>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한번 정정당당하게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1965. 11. 4>
거미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1954. 10. 5>
사랑의 변주곡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1967. 2. 15>
꽃 잎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1967. 5. 2>
詩를 쓰는 마음으로
<1960. 5. 18>
그 정직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시들의 아름다움이 진정 새로웠다는 점에서 그는 알짜 모더니스트였다.
김수영(金洙暎 1921 ~ 1968)
1. 출생 및 성장 2. 활동 및 작품경향 모더니스트로 각광 받음. 그간의 발표작을 모은 시집 <달나라의 장난> 간행 및 제1회 시협(詩協)상 수상 4.19혁명 : 시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 대표작 :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냄. 그는 지속적으로 사랑과 자유를 주제로 하는데, 자유는 그의 시적, 정치적 이상이고,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인 사랑이다. 5.16 이후 : 군사정권 득세 이후,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敵)'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연민, 탄식, 풍자 등을 작품화. 대표작 :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 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썼고,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 그 외 <시여, 침을 뱉어라>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 사후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 몇 권의 시선집과 산문집 발행. 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 됨.
[작가 이야기]
그는 돌에서 피를 뽑아 낼 정도의 치열한 자유의지로 우리 근대사의 뼈아픈 역사와 삶의 생채기를 온몸으로 껴안은 시인이다. 따라서 자유란 테마는 그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끈질긴 탐구의 대상을 이룬다. 이런 자유의 정신으로 벼려진 칼빛 언어에는 시적 진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김수영의 혹독한 자기 수련(修鍊)이 아로새겨져 있다. 결코 현실의 장벽에 굴복하지 않는 도저한 자유의지는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로 그려지곤 한다.
비상을 억압하는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돌, 무엇을 치어 받으려고 그토록 가열하게 날아가는가. 세상에 배를 밀착하고 날아가는 강인한 정신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그가 말하는 자유란 현실의 한계를 단박에 뛰어넘어는 '초월(超越)'의 희열이 아니다. 현실의 아픔과 상처, 갈등과 고통 위를 온몸으로 밀며 나가는 기어넘기, 즉 '포월(匍越)'이자 그 생채기를 안고넘는 '포월(抱越)'의 산고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자유, 그 반역의 정신은 좌절의 쓴맛과 직결된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자유// ―비애"('헬리콥터'). 헬리콥터는 곤고한 지상과 결별하며 이륙할 수 있는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이나, 종래에는 어딘가 착륙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비애가 병존한다. 이런 시적 모반의 정신이 극단에 이르면 그의 시는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며 혁명을 꿈꾼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반항의 정신이 돛을 올리는 순간이다. 4·19 혁명 직전에 발표한 '하……그림자가 없다'와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가 그 대표적인 시라 하겠다. 그의 이러한 문학 정신은 소위 말하는 '반시론(反詩論)' 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전복을 꿈꾸는 모든 전위 문학은 긍정이 아닌 부정의 정신을 근간으로 해야만 한다는 그의 헌걸찬 주장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여! 일상의 안일과 나태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그대들이여! 지금 어떤 모반의 전략을 꿈꾸고 있는가? 도대체 꿈꿀 수 있기는 한가? (류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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