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 잘린 캄캄한 나무 아래 서 있다. 건너편 은행나무 쥐똥나무, 봄볕에 파릇파릇 머리가 젖는데 양버즘나무는 여전히 알몸이다. 번번이 참수를 당하고 잔뜩 독이 오른 나무의 몸속엔 짐승의 더운피가 흐른다. 성대가 제거된 나무들, 일제히 소리없이 울부짖는다. 몸에서 빠지지 않는 슬픔들. 옹이에 옹이를 덧댄, 끔직한 상처들로 나무는 이미 사나운 짐승이다. 허물을 벗듯 몸서리치며 껍질을 벗는 양버즘나무에 얼마나 많은 톱날이 다녀갔나. 불거진 옹이, 잘리고 잘려 뿔이 된 나뭇가지. 누구든 건드리면 뭉툭한 뿔로 치받을 태세다. 올해는 얼마나 농사를 지어야 하나. 몇 가마니의 그늘을 지상에 부려야하나. 목련이 피고 라일락이 지는 동안 허공에 빈 밭만 갈고 있다. 사월이 다 가도록 뭉툭한 손으로 터진 살을 꿰맨다. 한 땀 한 땀 제 몸을 깁고 있다. 나무는 끈질기다. 키를 늘리고 더 깊이 뿌리를 묻는다. 상처 많은 양버즘나무를 바라보면 가난한 시인이 떠오른다. 진물 흐르는 생살 위에 금세 파란 귀를 내밀고 도시의 찌든 하늘과 매연과 소음을 천 개의 귀에 주워 담는다. 허공에 지은 집은 허공의 것, 자란 만큼 잘려지는 나무는 푸짐하고 넉넉하다. 제 발등에 무성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늙은 청소부는 돗자리만한 그늘을 자루에 쓸어 담는다. 어찌나 머리끝이 까마득한지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디 그렇게 키가 높던 나무였다. 놔두면 절로 하늘까지 오르는 나무였다. 모두 당당하고 의젓했다. 팔을 벌려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었다. 팔랑팔랑 바람을 주고받는 나무들, 나무들, 나뭇잎 옷자락이 푸른 하늘에 물결치고 귀고리 부딪히는 소리 찰랑 발등으로 떨어졌다. 수많은 방울귀고리를 흔들며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무심한 손들이 얼마나 나무에게 몹쓸 짓을 했는지, 관절을 부러뜨려 무릎 꿇게 하였는지 울컥 눈물이 고였다. 찌든 밑동에 일련번호가 찍힌 명찰 한 장 꽝꽝 못질해 두는 것 밖에. 겨우내 물을 퍼 올려 발끝을 적시고 목을 축이지 않으면 그 혹독한 추위를 탈 없이 보낼 수 있겠는가? 제 몸에 간직한 슬픔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그 슬픔의 힘으로 허리가 굵어지고 나이테가 새겨지고 마침내 향긋한 주검이 될 것이다. 나이테는 나무가 흘린 눈물자국, 물결처럼 파문 진 주름들이 눈물이 아니라면 어찌 죽음이 그렇듯 향기로울 수 있으랴. 언 손 호호 불며 제 몸에 텅, 두레박을 던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우듬지로 끌어올릴 것이다. 왜 시를 쓰는가?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 시를 쓰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슬픔 같은 것, 서러움 같은 것, 나를 목 메이게 하는 것, 목 타게 하는 것, 시는 나에게 막다른 골목이다. 어둡고 긴 골목을 구불구불 걸어와 닿은 막다른 골목, 더는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그런 막막한 벽이다. 나는 그 골목에서 절망하고 소망한다. 그 헛 약속에 속으며 날마다 늙어간다. 내가 조금만 더 행복했더라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이름 석자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모 시인도 ‘불행’이라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그때, 알았다. 시를 위해 두렵고 캄캄한 우물에 수없이 몸을 던진 분이라는 걸, 시로 인해 얻은 만큼 잃기도 했다는 것을. 강미정의 끝방을 보자. 아마 이 시인도 시를 붙들고 안절부절 내려놓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오래 시를 품고 앓았을 것이다. 그 많은 시인들이, 시야, 시야, 하고 부르지만 아무에게나 선뜻 제 살점을 떼어주지 않는다. 시 없인 못산다고, 나랑 한 살림 차리자고 붙들고 늘어지면 슬며시 마음을 열까. 그저 자나깨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싸늘히 등을 돌린다. 어느 시인은 토씨 하나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함께 놀아주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바람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시인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귀가 달려있을까? 헛농사가 대부분이다. 늘 적자뿐인 농사법(農事法)이다. 멀쩡한 정신이면 몸을 허물어 시를 쓰겠는가? 나 역시 시에 빠져 애지중지 키운 화초도 죽이고 십 년 넘게 사랑한 열대어도 죽였다. 그 좋아하던 운동도 친구도 다 버렸다. 독한 시를 끊을 수 없어, 끊어지지 않아, 끊어지는 것들을 먼저 버리고 말았다. 시로 인해 애태우고 있을 뿐이다. 시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아니 시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늘 헛농사를 짓는 나에게 시가 달려와 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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