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서울신문 신춘문예]
술빵 냄새의 시간 /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2009 경향신문 신춘문예] 맆 피쉬 /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2009 대전일보 신춘문예]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 최정아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망사 모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꽃들은 모자를 벗겨달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새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 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숨 고를 의자도 없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2009 무등일보 신춘문예]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 윤은희 1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2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 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 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 대구 수성구 파동 664번지에 있는 카페 [2009 국제신문 신춘문예]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즐거운 장례식 /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가게 세 줍니다 / 유금옥 나뭇가지에 빈 가게 하나 있었어요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화원을 차렸죠 (햇살 꽃방) 정말 그날부터 햇빛들이 자전거 페달을 쌩쌩 밟았다니까요 사랑에 빠진 벌 나비가 주 고객 이였는데요 창업에 성공한 사례였어요 서로 눈이 부딪치면 재재거리며 웃었어요 앗! 그때 여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어요 양은냄비 브래지어 구두 숟가락들이 낙엽이 되다니 아스팔트 바닥에 나 뒹굴다니 가랑잎 한 장만한 쪽지를 붙여 놓았지만 겨울 내내 가게는 나가질 않았어요 가게 세 줍니다 (연락처; 살구나무)
기와 이야기 /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童話) / 정원 봄은 아이들 시린 손끝에서 왔다 골목 안은, 어김없이 가위질 소리로 짤랑거리고 덩달아 온 세상 흰 밥풀꽃 가득한 뻥튀기 소리 와아, 골목 안 가득 풀려나오면 햇살처럼 환하게 웃음이 되는 아이들 달그락달그락 알사탕 같은 꿈들은 호주머니 속 숨겨둔 꽃망울처럼 시린 바람 끝에서도 붉었다
관계 1 / 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한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
'시인의 숲(명시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노해 (0) | 2009.01.30 |
---|---|
유치환 (0) | 2009.01.30 |
2009년 신춘문예 당선시 (0) | 2009.01.18 |
유안진 (0) | 2008.12.27 |
황동규 (0) | 2008.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