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향기

젊어도 보았네 늙어도 보았네

엄마라는 나무에 자식이라는 꽃을 피워 그 향기가..."

시인의 숲(명시의 향기~)

2009년 신춘문예 당선시

가을비 우산 2009. 1. 18. 23:30

 

 

문화일보/ 시

  

즐거운 장례식

 

 

              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 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수의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동화일보/ 시

 

 

술빵 냄새의 시간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 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오린 하늘

비대한 구름 떼

 

젖꽃판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조선일보/ 시

 

 

오늘은 달이 다 닳고

 

 

 

             민  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구멍이 나 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향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잡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경향신문/ 시

 

 

맆 피쉬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립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한국일보/ 시

 

 

무럭무럭 구덩이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눈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중앙일보/ 시

 

 

 

진열장의 매력

 

 

 

              임경섭

 

 

누르면 툭-하고 떨어지는

아침, 샴푸 통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졸음 있는 힘껏 짜낸

김 대리는 네모반듯하게 건물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인다 날마다 김 대리의 자리는 한 블록씩 깊어진다

아래층 이 과장은 한 박스 서류뭉치로 처분되었다지

누군가 음료수를 뽑아 마실 때마다 덜컹 내려앉는 일과,

버려질 것을 아는 이들도 사방으로 설계된 빌딩 속으로

차례대로 몸을 누인다

모든 가게의 비밀은 진열장 속에 있다

이리저리 굴러다녀야 할 것들을 가득 담아 놓은 과일바구니

모인 것들은 축축한 바닥에 한 번 튕겨보지도 못하고

뿌연 먼지로 내려지는 셔터를 기다려

어둠 속으로 무른 멍 자국을 감춘다

바닥에 떨어지거나 모서리에 부딪쳐 생긴 것보다

서로에게 짓이겨 생긴 멍 자국에서 과일은

더 지독한 향기를 뿜는다

곯은 사람들로 붐비는 퇴근길은 진한 매연 냄새를 풍기고

김 대리는 살구를 고른다 먼지 닦아가며 고르다가 떨어뜨린

살구 한 알 탱탱하게 굴러가는 곳을 본다

짓무르지 않은 것들은 저렇게 꿋꿋이 굴러다니는데

쌓여 있어 한 쪽으로 절뚝이는 것들아

살구를 주우러 가는 김 대리의 발자국에 통증처럼

저녁이 배고 높은 허공으로 신음처럼 새가 난다

곧지도 않고 함부로 꺽이지도 않는 길을 가는 새의 둥근 비행

그 아래서 김 대리는 둥글게 몸을 말아 살구를 줍는다

 

 

 

 

서울신문/ 시

 

 

저녁의 황사

 

 

 

              정영효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피부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람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 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부산일보/ 시

 

 

담쟁이 덩쿨

 

 

 

              조  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잔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좇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 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새어나가도 우리 신경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깍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른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 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매일신문/ 시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최정아

 

 

  한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 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들었다. 망사 보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새 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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