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향기

젊어도 보았네 늙어도 보았네

엄마라는 나무에 자식이라는 꽃을 피워 그 향기가..."

시인의 숲(명시의 향기~)

김남조

가을비 우산 2009. 3. 16. 21:39

    김남조

겨울꽃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꽃 앞에
오랫 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 되었어 

편 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평행선                                                    

 

우리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저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 본 적도 없지만은

둘이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로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생 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설일(雪日)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정념의 기(旗)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모양 걸려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펄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서시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6월의 시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단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네 생각 그 하나에                                      
 

너를 재우고 돌아서던 손시린 돌무덤에

이제 나도 영원히 쉬려고 찾아온 거다


별이란 그저

잠잠히 순명하는 광망(光芒)이더구나

새삼 무에랴 우리를 일께워

섧게 만드리

인식할 것으로 믿자


너를 불러 네 옆에 이처럼

나 돌아왔음은

진실로 하늘이 짚어준 길이었거니


무서리 내 가슴에 잠기고

흰 눈깨비 성성히 덮혀오는

경루 한밤에도

오직 네 생각 그 하나에

나는 살았더니다
 

 

고 백                                              
 
열. 셀때까지 고백하라고

아홉. 나 한번도 고백해 본적 없어

여덟. 왜 이렇게 빨리세?

일곱. .....

여섯. 왜 때려?

다섯. 알았어. 있잖아
넷. 네가 먼저 해봐

셋. 넌 고백 많이 해봤잖아

둘. 알았어

하나반. 화내지마 ..있잖아

하나. 사랑해

 

 

 

김남조 金南祚 (1927. 9. 26 -   )                                                                


192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사랑과 인생을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해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계관시인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후쿠오카[福岡] 규슈여고[九州女高]를 졸업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예과를 수료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1991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초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강사를 거쳐 1955년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1993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2년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1984~),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1986~),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90~), 방송문화진흥회 이사(2000~)로 활동하고 있다.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星宿)》 《잔상(殘像)》 등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이어 1953년 첫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사랑의 그리움을 노래한 첫시집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참신한 정열의 표출이 조화를 잘 이룬 초기 대표시집으로 평가된다. 이후의 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1960) 등으로 이어지면서 뜨거운 정열의 표출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갈망이 더욱 심화되어 절제와 인내가 내면화된 가운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감어린 세계를 그려낸 시집 《겨울 바다》(1967)를 비롯해 《설일(雪日)》(1971) 《사랑초서》(1974) 《동행》(1980) 《빛과 고요》(1983) 등 후기 시집으로 가면서 더욱 심화되어감을 알 수 있다. 특히 제8시집 《사랑초서》는 전편이 '사랑'을 주제로 다룬 연작시로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가의 면모를 더욱 분명히 해준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간의 영혼을 고양하는 사랑의 원초적인 힘을 종교적 시각에서 승화시켜 노래한 작가는 1950년대 등단 이후 현재까지 의욕적인 작품활동으로 30여 권이 넘는 시집을 발간했다. 삶의 근원이자 원동력인 '사랑'에 관한 지속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천착을 통해 생의 존재론적 탐구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등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회 자유문인협회상(1958), 제2회 오월문예상(1963), 제7회 시인협회상(1974), 서울특별시문화상(1985),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88),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1993)과 은관문화훈장(1998) 등을 받았다.

 

저서에 시집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1963) 《겨울 바다》 《설일》 《사랑초서》 《동행》 《빛과 고요》 《바람세례》(1988) 《평안을 위하여》(1995) 《희망학습》(1998) 등이 있고,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3) 《시간의 은모래》(1965) 《달과 해 사이》(1967) 《그래도 못다한 말》(1968) 《여럿이서 혼자서》(1971)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1975) 《사랑의 말》(1985)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등이 있다. 이 밖에 꽁트집 《아름다운 사람들》과 일역시집 및 다수의 시선집이 있다. 

 

 


 

 

원천에서 지류까지 사랑이 담긴 시정신(詩精神) - 김남조 시인

  


김순진 (시인, 월간 스토리문학 발행인)

 


 

지난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본지 편집위원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 있는 유희봉 시인이 이번 메인스토리에 김남조 시인을 모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보내왔다. 그간에도 스토리문학관 최현근 회장이 김남조 시인을 모셨으면 좋겠다고 누차에 걸쳐 말씀해 왔던 터라 내심 너무나 기뻤다. 어려서부터 문학의 어머니처럼 마음에 모시고 있던 김남조 시인을 우리 스토리문학의 메인스토리에 모신다는 말만 들어도 나는 금방 두근거리며 가슴이 메어온다. 유희봉 시인이 김남조 시인께 전화를 드리니 이번 달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문학저널> 등 여러 잡지사에서 취재하는 곳이 많으니 다음 달로 미루자는 말씀이 있었다고 전해왔다.

일일이 여삼추라 했던가? 김남조 시인을 뵙고 싶은 마음에 한 달을 기다리려니 정말 시간이 가질 않는다.

그러던 중 문단에 조사(弔事)가 있었다. 평생을 언론과 문화 여성운동에 몸바쳐온 수필가 월당 조경희(세레명 : 아가타) 선생께서 별세하여 8월 9일 오전 10시 성공회 대성당에서 그 장례미사가 있었던 것이다. 유희봉 시인과 함께 조경희 선생의 장례미사에 참석하니 그곳에는 문단의 원로들께서 많이 나오셔서 조경희 여사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애도하고 있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영결예식 순서에 고별사를 하는 김남조 시인의 모습에서 필자는 우리가 뵐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기에 스토리문학에서 더욱 받들고 섬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메인스토리 취재에 앞서 김남조 시인을 향한 마음이 더욱 경건히 다가왔다.

영결미사 후 고인을 태운 영구차 주변에는 수많은 문인들과 정치인을 볼 수 있었다. 유희봉 시인은 잠시 필자의 손을 이끌고 김후란 시인과 나란히 서 있는 김남조 시인 앞으로 가 인사를 시켰다. 언젠가 어느 문인이 ‘어른께 명함을 드릴 때엔 직책을 연필로 긋고 드리는 것이 예’라는 말씀이 생각났지만 미처 그런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대 계관시인께 스토리문학 이름이 적힌 명함을 드리는 것에 대하여 송구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사명감에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김남조 시인을 취재하는 날짜가 8월 20일 오전 11시로 확정되었다.

필자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그간 스토리문학관을 창립하고 월간 스토리문학을 창간하여 문인들에게 활동의 공간을 마련해 주느라 애쓴 최현근 회장께 소식을 전하니 몽매간에 뵙고 싶었던 40년 꿈을 이루게 되었다며 너무나 기뻐하였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밝았다.


 


 

 

필자는 미리 인터넷을 검색하여 김남조 시인의 자료를 한 다발이나 인쇄하여 읽으며 나름의 준비를 하였다. 어젯밤엔 약속도 많았건만 모두 물리쳤다. 아무리 중요한 약속이라도 김남조 시인을 만나는 것만 하겠는가? 다른 날보다 일찍 집에 들어와 일찌감치 잠을 청하려니 선생의 얼굴이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천장에서 내려다보시며 웃고 계신다. 시골 문학 소년이 단 한 시도 문학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대 시인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벅차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날보다 더욱 일찍 일어났다. 귀한 분을 모실 차이니 새 차는 아니지만 청소도 좀 해야겠고 무엇을 여쭐 것인가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아홉시에 출발하여 선생께서 일러 주신대로 찾아가니 시간은 열시가 채 안되었다. 조심성 있게 질문지를 훑어보았다. 조금 기다리려니 유희봉 시인이 도착하고 연이어 최현근 회장이 도착하였다. 유희봉 시인이 그래도 여성이시니 꽃을 사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아직 더운 팔월 날씨에 꽃집 몇 군데를 뛰어다니니 모두 휴가인지 아니면 아직 문을 열 시간이 안 되었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고 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유희봉 시인은 꽃을 사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며 노인들이 좋아한다며 복숭아 한 박스를 샀다.

김남조 시인과의 약속시간은 오전 11시인데 모두들 10시쯤에 도착하여 기다리려니 잠시라도 빨리 뵙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유희봉 시인이 전화를 드리니 밖에서 기다릴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며 선생께서 빨리 들어오라는 말씀이다.


선생의 집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하얀 이층집! 누구나 꿈꾸던 그런 집이다.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마치 성당에 들어온 느낌처럼 곳곳에 부군이신 김세중 선생께서 조각하신 성모마리아상과 많은 조각상들이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선생은 불편한 다리를 이끄시고 손을 잡아주시며 반겨주신다.

선생의 책상 위에는 스토리문학 8월호가 올려 있었다. 꼼꼼하신 분이니 아마도 스토리문학의 메인스토리에 대하여 미리 검토해 보신 모양이다.

연세가 78세라는데 어쩌면 저리도 단아하고 우아하게 늙으실 수가 있을까? 선생은 지팡이를 짚는 외에 외양으로는 건강해 보였다. 더욱이 그 소녀 같이 순수한 모습과 아직도 소녀의 목소리는 78세의 할머니라는 생각을 잠재우기에 충분하였다. 필자는 속으로 선생의 모습에 배어있는 지성과 우아함에 감탄하면서 또다시 가슴이 벅차오름을 누르고 선생께서 준비해 주신 멜론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김남조 시인은 1927년 9월 26일 경북 대구에서 아버지 김소도 선생과 어머니 최정욱 여사 사이에서 장녀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로 1955년 대학교수이면서 조각가로 유명한 김세중(金世中. 작고) 선생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정아(晶雅. 1956년생), 장남 녕(寧. 1958년생), 차남 석(晳, 1960년생), 3남 범(範. 1963년생) 등 1녀 3남이 있다.


이번호에는 김남조 선생과의 메인스토리 취재 글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살아온 인생 이야기와 문학, 그리고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대담형식으로 싣는다.


 


 

최현근 회장 : 선생님! 이렇게 이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희 미천한 스토리문학의 메인스토리 취재에 응대해 주셔서 한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다리가 불편하신 것 외엔 외관상으로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만 어떠신지요? 우선 선생님의 어머니는 단순히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스승이었고 독자였으며 돈독한 신앙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말씀 좀 해주세요.


김남조 시인 : 네, 최 회장이 나의 대학 후배라니 우선 반갑습니다. 또 신학을 하는 분이라니 감사하구요. 건강은 좋은 편입니다. 몇 년 전에 얼음에 넘어져서 대퇴골 고관절이 부서졌어요.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 거동하지만 건강은 좋은 편입니다. 어머니에 대해 말하려 하면 저는 가슴이 뭉클하며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대학 시절 이야기와 돌아가신 무렵의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대학 때, 어설픈 글들이 간혹 활자로 찍혀 나올 때면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내 글을 기뻐하고 아껴준 독자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문인으로 설 수 있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둘이서만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그 시절은 이 세상 사람의 절반쯤이나 되는 비중이었지요. 그래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땐 바로 내 자신이 죽은 느낌이었지요.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한 젊은 신부에게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 신부에게 당부하여 그 신부가 죽는 날까지 날마다 하는 기도 중에 딸을 위해 몇 가지 축원을 보태어 줄 약속을 받으셨지요. 어머니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예수고상을 늘 손에 쥐고 계셨던 생각이 납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짧게 다듬은 기도구절을 아예 만들어 그 신부에게 주셨고 수중에 남아있던 많지 않은 돈 전액을 미사 예물로 건네시며 부탁하셨던 거예요. 천주교회에서는 한 사제와 죽은 이와의 서약은 신성할 수밖에 없으며 오늘까지  지켜져 온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1967년 6월 20일 시계가 정확히 정오를 짚을 때 숨을 거두셨지만 그 이후 내 몸 속에서 나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유희봉 시인 : 선생님의 유년시절, 그리고 소녀시절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김남조 시인 : 나의의 유년에 대한 기억은 빈 방에서 하루 종일 가위로 종이를 썰고 놀았던 기억 외엔 별로 없습니다. 일제 시대 중반에 태어난 사람이므로 일본어를 국어라 부를 시절 일본어를 쓰라는 강압에 어린 마음에도 분노와 비애가 치받곤 했습니다. 대구에서 남명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가게 되었고 일본에서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졸업하였습니다. 여고시절 폐결핵을 앓게 되었는데 그 시대는 정신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교육시책으로 지각과 조퇴가 없는 출석률 100%를 경합적으로 시키는 시대였으므로 장기 결석이 불가피한 학생들은 조건부(병이 나으면 즉시 재입학)로 자진퇴학을 요청받아 수개 월 퇴학 조치되었으나 그 후 재입학으로 졸업이 인정되었지요. 그러나 단 한 명의 외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학교에서 학적마저 잃은 열일곱 살의 병든 나는 종이 질이 매우 거끄러운 연습장에 어수선한 잡문 수기를 여러 권 쓰면서 참담한 한 시절을 견뎌냈습니다. 그때 나는 식민지의 아이로 소외감과 역경에 억눌린 자아인식의 필연적 폭발 같은 그런 충동으로 무엇인가를 쓰게 된 듯합니다. 그 당시 결핵은 지금의 암과도 같은 난치병으로 ‘초라함과 불쌍함’이 나의 존재의 대명사였고 이와 대치되는 욕구로서 건강과 막연한 명성을 꿈꾸곤 했습니다. 당시 내가 가장 부러웠던 심벌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도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음을 기억합니다. 오랜 후이지만 1984년 ‘소설문학’에 콩트를 24개월간 연재했고『아름다운 사람들』이란 콩트집으로 출간되었으며 그 후 출판사를 바꾸어 요즘도 중판으로 서점에 내고 있습니다.


최현근 회장 : 그럼 한국에는 언제 돌아오셨으며 그 후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첫 시집은 그 무렵에 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남조 시인 : 네, 해방되기 바로 한 해 전인 1944년에 한국에 돌아왔고 전시체제에 이화대학(그 당시 학교명 경성여자전문학교)을 다니던 중 해방을 맞이했고, 방학 중 이북의 어머니 친지 집에 가 있다가 삼팔선에 막혀 학적상실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서울사대 국어과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학년에 이르러 6.25전쟁이 나고 재 남침 때 마산으로 피난하여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알게 된 학생들 중의 몇몇이 후일 각 분야에 인재가 되어 사회에 공헌한 일이 보람을 느낍니다.

1953년 발간된 첫 시집 『목숨』은 전란이 벌겋게 혼돈과 비극을 담아내던 시대에 사람의 울음과 사랑을 나름으로 노래한 것으로서 주변의 지인 몇 사람이 주선한 출판기념회에 당시 문단의 원로분도 몇 분 오셔서 축복을 주셨기에 감격스러웠지요. 그러나 그 이후 나는 수많은 책을 출간해 오면서 단 한 번의 출판기념회도 갖지 않았습니다. 또한 첫 시집 『목숨』의 발문을  이헌구 선생께서 써주셨지만 그때 이후 어느 책에서건 다른 분들을 번거롭게 만드는 서문, 발문, 서평 등의 글을 단 한 줄도 실어본 일이 없고 그러나 출판사 자체에서 기획해서 실은 글들은 많이 있지요.


유희봉 시인 : (조각상들을 가리키며) 여기 이 모든 조각상들이 부군이신 김세중 선생의 작품들이지요? 김세중 선생은 유명하신 조각가로 알고 있습니다. 부군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김남조 시인 : 피난지 마산의 성지여고에 근무할 때 그 학교 학생들의 연극공연이 있었을 때 저는 그 지도를 맡았고 그 사람은 무대그림과 무대장치를 맡게 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그 후 둘 1955년 조각가 김세중과 중림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후 우리 두 부부는 정말 바쁘게 살았지요.  열심히 생활한 나머지 가계의 궁핍은 면했으나 바쁜 부모를 가진 아이들의 외로움이나 의기소침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이 후회로 남기도 했습니다.  가족을 위한 시간은 절대로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럭저럭 오랜 세월이 지났고 남편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이 완성된 직후 업무의 과로와 병발증으로 돌연 사망하였습니다. 그 때  생명과 일, 생명과 사회활동과는 비례와 평형이 매우 중요함을 절감한 바 많았습니다.

 

 



 

김순진 발행인 : 선생님! 선생님에 있어 시는 무엇인가요? 선생님의 시론들 듣고 싶어 하는 스토리문학관의 수많은 독자들이 있습니다.


 
김남조 시인 : 시인에게 있어 시는 절대 대상이며 하나로 통합되는 동일 존재입니다. 나는 문학지상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시를 향하는 강렬한 집중을 언제나 지향합니다. 그러기에 이를 따라주지 못할 땐 대인 관계 때와 마찬가지로 도덕이나 양심까지 뒤흔드는 압박감을 초래하게 됩니다. 나도 그런 점으로 인하여 ‘몇 번이나 낭떠러지에까지 떠밀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시인이 그러하고 수많은 시의 독자들이 그러해 주듯이 나 역시 시를 사랑합니다. 시야말로 내 정신이 출산한 적자(嫡子)요, 내 문학의 명분이 이에 달려 있다고 시종 그 인식을 다져왔습니다. 시를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려야지만 또 시를 위하여 많은 것을 주워 담고 보듬어야 합니다. 앞의 말은 시의 집중을 뜻하며 뒤의 말은 심성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시란 복잡한 논리요 수시로 변하는 기상과도 같은데, 왜냐하면 창작의 원리 그것부터가 전신(轉身)이며 변혁의 명령인 탓입니다. 따라서 일반기능자에겐 명장(名匠)이 있을 수 있으나 시인에게는 오로지 초심자의 조심성과 중압해오는 고뇌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시는 기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정신입니다. 시는 순박하면서도 진실한 시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직접 시를 쓰지는 않으면서 시를 애독하는 독자 역시 시인입니다. 열광하는 사람이 정말 예술가입니다. 축구장에서 뛸 수 있는 수는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운동장 안에 있는 선수가 드리블을 하거나 골인했을 때 운동장 밖에서 열광하는 관중이 진짜 축구인 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 세대를 걸치는 동안 소수의 독자가 진정한 참으로 그 시인에 영혼을 나누어 가지는 이들이며 따라서 그 수요가 많기를 바라기보다 진정한 독자를 소원하며 노력할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유희봉 시인 : 선생님의 문학에 들어있는 정신은 무엇입니까?

 
김남조 시인 : 문학은 괴로운 자아 인식에서 출발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둔화는 문학의 탄력을 줄인다는 말이 되겠기에 오히려 고통의 배양이 요구됩니다.  문학하는 사람은 고통에 있어서도 건강하고 강렬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고통과 등가(等價)인 창조성, 통틀어 ‘살아 있음’을 아픔과 함께 선열하게 감지하고 몰입한다는 뜻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으며 그것을 문학 안에서 형상화해야 합니다.
나의 시가 지향하는 바는 특별한 개성이기 전에 위대한 보편성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사랑의 연대(聯隊), 화해의 연대에 끼어 가고 싶습니다. 원천에서 지류까지 시가 원하는 바는 사랑이라 믿으며 이 길을 걸어감을 광영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독자들에게 나의 시를 편안하게 읽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쉽게 씁니다. 나의 시는 절망적인 색조에서 끝내지 않고 소망스러운 암시를 필히 입혀놓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절망의 유인이 너무 많으며 우리시대가 과도하게 위험하다고 알기 때문입니다. 나쁜 일과 함께 좋은 일을 보는 시력, 아울러 전부를 보는 눈을 가지며 전인전심 철저히 심정적인 시와 심정적인 삶에 머무르기를 원합니다. 내게는 얼마간의 감수성이 문학적 축복의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에서 먹듯이 감수성의 토양에서도 나는 먹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과 내 문학의 힘입니다.

 

 
최현근 회장 : 선생님께서는 참회란 말을 자주 생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참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김남조 시인 : 네, 최 회장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늘 참회라는 어휘를 생각합니다. 어느 책에선가 ‘양심은 엄숙한 취미’라는 글을 읽었던 생각이 납니다. 숫돌에 칼을 갈아 서슬 푸른 칼날을 세우는 일처럼 사람의 양심도 갈고 다듬어야 하며 그와 같이 시인의 문학혼도 연마해야 합니다.
(시인은 보다 솔직한 문학, 솔직한 신앙을 위해 끊임없이 자각하고 반성하는 귀감을 보여 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그녀의 세례명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유희봉 시인 : 선생님!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이신 줄 압니다만 선생님의 신앙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김남조 시인 : 나는 그리스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 생애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 모범생은 전혀 아니지만 주께서는 분명 존재의 깊은 곳에 통로를 트시고 수시로 발소리를 울려주시지요. 이 점 만민의 믿음이며 나도 그 중의 하나임을 자처합니다. 나는 영세 명을 막달라 마리아로서 정했으며 신앙적 체험 없이도 나의 그릇은 차 있거나 ‘주여!’ 혹은 ‘주님’이라 부르기만 해도 마음속이 충만해 질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어머니를 부르는 일만으로도 행복한 어린아이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신앙이 뿌리째 무너지는 듯 하거나 지붕이 벗겨진 집처럼 허약하고 위태할 때도 자주 있습니다. 그 때마다 형편없는 무력감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끼 낀 돌 벽을 집고 일어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존재와 존재 이전의 토양에까지도 손을 깊이 넣으시어 화초를 떠 옮기듯이 우리를 빛과 바람이 풍족한 곳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예수이기에 저의 예수입니다. 이른바 내 문학도 그 분의 진리를 증언하고 그분께 봉헌할 때에 가장 값지고 보람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최현근 회장 : 그러면 선생님의 신앙에 있어 시는 무엇입니까?

 
김남조 시인 : 내 시는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권능의 부스러기 같은 것입니다. 저는 시를 쓸 수 있는 것과 시를 읽을 수 있는 것, 고통과 번민으로 날을 샐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시는 써 갈수록 더 어렵습니다. 30년 전의 시와 비슷하게 오늘 새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자기 표절입니다. 전부 다르게 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억천만 입자 중에 한 가루, 한 입자가 나를 도왔습니다. 역사하는 과정 속에 나를 끼워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김순진 발행인 : 선생님의 시가 가곡이나 가요로 작곡되어 불리는 곡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남조 시인 : 네, 작년 2004년에 11월엔 작곡가 이영자교수가 제 시에 곡을 붙인 노래들을 소개하는 '세월의 거울 앞에서'란 음악회(금호아트홀)를 열었었습니다만   ‘그대 있음에, 가난한 이름에게, 겨울바다, 너를 위하여’ 등 많은 시가 여러 작곡가에 의해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나 친숙해지고 애창된 노래는 ‘그대 있음에’ 하나로 김순애 곡, 송창식 곡 두 가지 모두 비교적 보편화되었습니다.

 
유희봉 시인 : 선생님께서는 연세가 많이 드셨는데 그래도 창작은 계속 하시게 되겠지요?

 
김남조 시인 : 네, 남은 세월이 그리 많지 않음은 알고 있습니다. 예전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건강과 총기가 다소 남아있는, 내 생애 끝 무렵 몇 년쯤은 아직 못다 본 아름다운 것 무량한 것, 위대한 자연과 탁월한 이들의 여러 명작을 바라보고 읽으며 감동할 수 있기 바란다고요. 그런데 아직은 좀 더 글을 써야 할 때인 것 같군요.

 
최현근 회장 : 선생님! 한 6연전에 제가 스토리문학관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했습니다. 지금은 회원도 제법 많지요. 그 회원 중에 등단하려는 사람도 많이 늘어나고 또 지면에 발표하고 싶은 작가도 생기고 하여 자연스럽게 잡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작년 6월에 창간하여 이제 15호를 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터넷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남조 시인 : 6년 전에 스토리문학관을 만들었다고 하니 최 회장께서는 착상과 순발력이 훌륭하시군요. 그간의 업적이 또한 경하스럽습니다. 바른 생각과 용기가 아주 맘에 드네요.  최 회장이랑 유희봉 선생, 그리고 김 부장(필자를 그리 부르신다)을 보니 아주 팀웍이 잘 맞아 보기에도 든든합니다. 100년 전쯤의 순박한 한국인을 만나본 것 같고 스토리문학이 성숙할 것으로 믿어집니다.
저는 처음에 최 회장이 들어와서 인사할 때 철학과를 나왔다는 말에 대하여 감동했어요. 게다가 요즘 그 나이에 신학대학원을 다닌다니 더욱 감탄스럽습니다. 요즘같이 이 각박하고 물질우선주의 풍조에 젖어있는 현실에서 볼 때 철학을 공부하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그리고 환갑의 나이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알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한다니 정말 특별한 사람 같아 보입니다.
앞으로 스토리문학의 발전이 눈에 보입니다. 제 시나 콩트 등을 스토리문학관에 일부 올리셔도 좋습니다.

 
최현근 회장 : 선생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우리 스토리문학관 회원들에게도 큰 영광과 기회가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내 주셔서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터뷰가 끝나니 선생은 세 사람에게 그간 나온 여러 시집들과 수필집 그리고 1184페이지나 되는 국어대사전 두께의 『김남조시전집』(국학자료원, 2005) 등 푸짐한 책 선물을 주시니 책을 좋아하는 필자의 입에 벌어진다. 선생은 서교호텔근처 불교방송국 맞은편에 가면 당신이 가끔 손님과 함께 가는 한정식집(진사댁)이 있다며 그리로 안내하였다. 정말 정갈한 음식과 고풍스런 분위기에 원로 시인과 함께 먹는 점심은 행복한 밥상이었다. 선생은 스토리문학의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며 걱정해 주었다. ‘적자가 되면 안 된다’며 또한 인터넷 문학의 선두주자로서 스토리문학관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선생은 그냥 등단시키고 말 것이 아니라 관리가 필요하다며 창작교실을 열고 재충전 재교육을 통해 살아남는 문학지가 되어 달라고 진심어린 당부를 하였다.

 
김남조 시인의 시세계는 시의 독창성과 연마된 기법만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이러한 진실된 열정, 경건한 신앙, 겸손하고 순한 언어는 서로 조화되어 아름다움을 이룬다. 그러기에 시인의 시어는 유순하고 겸허하다. 특수어나 은어적인 요소가 배제되어 있어 시 자체로 독자의 접근을 막는 바가 없다. 그의 시에 있어 궁극적인 주제는 사랑이며 그 내용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른 것인 만큼 소박하고 투명하다 하겠다.
우리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싫은 감정이 들 수 없듯이 시인을 바라보면 절로 따르고 싶고 존경하고픈 마음이 생긴다. 언제라도 고향을 생각하면 금방 눈물이 핑 돌듯이 시인의 시를 바라보면 그 맑고 투명한 시어에 눈물이 돈다.
다시 한 번 스토리문학의 메인스토리 취재에 나와 주신 김남조 시인님께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마음으로 하시는 일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리며 독자를 위하여 김남조 시인의 시 3편을 싣는다.
                                                          (편집부)


 

 
나의 시에게 1 외 2편

 
김남조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슬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주언呪言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나의 시에게 2

 
나의 시
내게서 독립하여
마주 보는 문이 되어라

 
우중雨中에 기차를 타고
유수같이 흐르는 풍경을 보던 중
나의 세상살이도
비의 주렴 너머
한 빛깔 뭉개진 삼인칭의 부피임을
문득 깨달았느니

 
나의 시
내게서 독립하여
나의 이인칭이 되어라

 
두 문으로 마주 서서
절로 오는 거 절로 다녀가게 길 터주며
안 쓰이는 외로운 이름들을
간절히 간절히 호명할지니

 
 
나의 시
나 떠난 후에도
오래오래 너는 그렇게 하여라
부름 없는 외로운 이름들을
땅 끝까지 불러주는
눈물 같은 순정의
이인칭이 부디 되어라

 
 
나의 시에게 3

 
너를 수술대 위에 뉘이고
해부도를 들이대는 짓거리들
더는 하지 않으리
맨손에도 진맥이 잘 잡히는
수척한 네 오장육부

 
오랜 불화 동안
둘 사이에 둔 은장도 한 자루도 거두리라
상처에 소금 뿌려 비비는
잔혹함도 삼가리

 
무엇이나 잊어버리는
건망증의 노년기
잘 마른 바람 속에 나란히 앉아
아슴한 지평이나 바라보자
지평선 그가 곧
새로이 기억할 오늘의 친구이며
여생의 우리 스승일지니……

 
해으스름에야
처음으로 편해지는
나의 시여
 
 


 


 

 

김남조 시인의 연보


1927. 9. 26. 경북 대구에서 아버지 김소도 선생과 어머니 최정욱 여사 사        이에서 장녀로 출생함

1940 대구시 남명 초등학교 졸업

1944 일본 후쿠오카 큐슈여고 졸업

1947 서울대학교 문예과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입학

1948 ‘연합신문’에 시 「잔상」, ‘서울대 시보’에 「성숙」등 작품 발표

1951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마산 성지여고 교사, 마산고 교사

1953 이화여고 교사

      서울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강사

      첫 시집 『목숨』, 수문관 간행

1955 2시집『나아드의 향유』, 남광문화사 간행

     숙명여대 전임강사, 조각가 김세중과 결혼

1956 장녀 정아(晶雅) 출생

1958 3시집 『나무와 바람』, 정양사 간행

     제1회 자유문협상 수상

     장남 녕(寧) 출생

     숙명여대 조교수

1959 한국여류시선집 『수정과 장미』, 편저 정양사

1960 4시집 『정념의 기』,정양사 간행

     차남 석(晳) 출생

1961 숙명여대 부교수

1962 박목월과 공동문집 『구원의 연가』, 상아출판사 간행

1963 5시집 『풍림의 음악』, 정양사 간행

     제2회 오월문예상 수상

     3남 범(範) 출생

1964 숙명여대 교수

     첫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 신구문화사 간행

1966 2수필집 『시간은 은모래』, 중앙출판공사 간행

1967 6시집 『겨울바다』, 상아출판사 간행

      3수필집 『달과 해 사이』상아출판사 간행

1968 4수필집 『그래도 못다한 말』 상아출판사 간행

1971 7시집 『설일』, 문원사 간행

      5수필집 『다함없는 빛과 노래』, 서문당 간행

1972 『김남조 전작집 전7권(후에 9권까지 증보)』, 서문당 간행

      6수필집 『여럿이서 혼자서』, 서문당 간행

1974 8시집 『사랑초서』, 서문당 간행

      제7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75 『김남조 육필시선집』, 문학사상사

1976 9시집『동행』, 서문당 간행

1977 7수필집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 갑인출판사 간행

1979 8수필집 『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 여원사 간행

1981 가톨릭문우회 대표

1982 10시집 『빛과 고요』, 서문당 간행

1983 11시집 『시로 쓴 김대건 신부』, 성바오로출판사 간행

     『김남조시전집』, 서문당 간행

      9수필집 『사랑의 말』, 우주 간행

1984 한국시인협회 회장

      2년간 ≪소설문학≫에 연재한 꽁트 『아름다운 사람들』소설문학사 간행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

1985 일본어 번역시집 『바람과 나무』일본 화신사 간행

      제40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잠언집 『생각하는 불꽃』어문각 발행

1986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남편 김세중 교수 별세

1987 방송위원회 위원

1988 12시집 『바람세례』, 문학세계사 간행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한국방송공사(KBS) 이사

1990 제12차 서울 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桂冠詩人)

      예술원 회원

1991 서강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10수필집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자유문학사 간행

     『김남조 시전집』증보판(31판) 발간, 서문당 간행

1992 제33회 3?1문화상 수상

1993 숙명여대 정년퇴임, 명예교수

      국민훈장 <모란장> 받음

      11수필집 『예술가의 삶』혜화당 간행

      영역시집 『Selected Poems of Kim Namjo』, 미국 코넬대학 간행

1995 13시집 『평안을 위하여』, 서문당 간행

      일역시집 『바람세례』, 일본 화신사 간행

1996 독일어 번역시집 『Windraufe』, 독일 흘레만출판사 간행

      제41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998 제 14시집『희망학습』, 시와 시학사 간행

      일역시집 『韓國三人詩集』구상, 김광림 공저 일본 토요미술사

      <은관문화훈장> 받음

1999 11수필집 『사랑 후에 남은 사랑』미래지성사

2000 방송문화진흥회(MBC) 이사

      일본 세계시인제에서 제 25회 <지구문학상> 수상

2002 한국대표시인선집 『김남조 시선집』문학사상사 간행

2003 스페인어 번역시집 『Antologia Poetica』, 스페인 Editorial Verbum S.L 간행




저서


<시집>

1953『목숨』정양사, 1955『나아드의 향유』산호장, 1958『나무와 바람』정양사, 1960『정념의 기』정양사, 1963『풍림의 음악』정양사, 1967『겨울바다』상아, 1971『설일』문원사, 1974『사랑초서』서문당, 1976『동행』서문당, 1982『빛과 고요』서문당, 1983『시로 쓴 김대건 신부』성바오로, 1988『바람세례』문학세계사, 1995『평안을 위하여』서문당, 1998『희망학습』시와 시학사, 2004『영혼과 가슴』시와 시학사, 2004『김남조 시전집』국학자료원


<시선집>

1967『김남조 시집』상아, 1973『영혼과 빵』성바오로, 1975『김남조 육필시선』문학사상사, 1983『김남조 시전집』서문당, 1983『마음과 마음』홍성사, 1984『눈물과 땀의 향유』열음사, 1984『김남조 시선』마당문고사, 1985『저무는 날에』성바오로, 1985 『너를 위하여』어문각, 1986『말하지 않는 말』문학사상사,  1987『겨울나무』자유문학사, 1988 『새벽모다 먼저』문학과 비평사, 1988 『깨어나소서 주여』종로서적, 1990『겨울꽃』신원문화사, 1991『민음을 위하여』자유문학사, 1991『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1991『김남조 시전집』서문당, 1993『겨울사랑』동서문학사, 1997『외롭거든 나의 사랑이소서』좋은날, 1998『너를 위하여』오상, 2002『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문학사상사


<번역시집>

1985 일본어 번역시집 『바람과 나무』일본 화신사, 일역시집 『바람세례』, 일본 화신사 , 일역시집 『韓國三人詩集』구상, 김광림 공저 일본 토요미술사, 1993 영역시집 『Selected Poems of Kim Namjo』, 미국 코넬대학, 1996 독일어 번역시집 『Windraufe』, 독일 흘레만출판사, 2003 스페인어 번역시집 『Antologia Poetica』, 스페인 Editorial Verbum S.L 간행


<수필집>

1964 『잠시 그리고 영원히』신구문화사, 1966『시간은 은모래』중앙출판공사, 1967 『달과 해 사이』상아출판사, 1968『그래도 못다한 말』상아출판사, 1971 『다함없는 빛과 노래』 서문당, 1972 『여럿이서 혼자서』서문당, 1977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갑인출판사, 1979『기억하라 아침의 약속을』여원사, 1983 『바람에게 주는 말』, 1983 『사랑의 말』우주, 1986『사랑을 어찌 말로 다 하랴』자유문학사, 1999 『사랑 후에 남은 사랑』미래지성


<수필선집>


1975『그대들 눈부신 설목같이』삼중당, 1976 『이브의 천형』범우사, 1977 『만남을 위하여』갑인, 1978 『그대 사랑 앞에』문학예술사, 1980 『그 이름에게』주부생활사, 1981 『진주를 만드는 상처들』서문당, 1983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홍성사, 1984 『저희는 홀로이옵니다』문학세계사, 1985 『생각하는 불꽃』어문각, 1985 『그가 네 영혼을 부르거든』중앙일보사, 1986 『어느 먼 이름에게』예전사, 1986 『먼데서 오는 새벽』어문각, 1986 『돌의 마음에 산울림이』예전사, 1986 『고독보다 깊은 사랑』영언문화사, 1987 『가슴 안의 그 하나』가누리언,  1988 『영혼의 새벽』청맥, 1991 『가슴을 적시는 비』문화행동


<기타>


1959 편저 『수정과 장미』정양사, 1984 꽁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소설문학사, 1985 편저 『생각하는 불꽃』어문각, 1993 편저 『예술가의 삶 ? 7』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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