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 - 김남조
사랑한 일만 빼고
나머지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고
진작에 고백했으니
이대로 판결해다오
그 사랑 나를 떠났으니
사랑에게도
분명 잘못하였음이라고
준열히 판결해다오
겨우내 돌 위에서
울음 울 것,
세 번째 이와 같이 판결해다오
눈물 먹고 잿빛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봄에 다시 참회하리라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항로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만
이렇게들 모여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 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체 돌아 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 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겨울 꽃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꽃 앞에
오랫 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 되었어
제 1부 「빛과 고요」의 가만한 사랑
(열번째 시집 . 1983>
나 무 들 4
보아라
나무들은 이별의 준비로
더욱 사랑하고만 있어
한 나무 안에서
잎들과 가지들이
혼인(婚姻)하고 있어
언제나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이들이 사랑하는 줄
나는 알았지
오늘은
비를 맞으며
한 주름 큰 눈물에
온몸 차례로
씻기우네
아아 아름다와라
잎이 가지를 사랑하고
가지가 잎을 사랑하는 거
둘이 함께
뿌리를 사랑하는 거
밤이면 밤마다
금(金)줄이 뻗치는 별빛을
지하로 지하로 부어내림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았지
보아라
지순무구(至純無垢)
나무들의 사랑을 보아라
머쟎아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남게 될 일을
이들은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깊이만큼
사랑하고 있어
가 을 3
불을 문
한 가치의 성냥에
치마끈 푸는
거푸거푸 풀어 던지는
이
단풍(丹楓)숲
사랑의 말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해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 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大門) 중문(中門) 다 지나는
맨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罰)이 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에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下直)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송(頌)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으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침상(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 걸
그저
온마음 더워 오고
내 영혼 눈물 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서 녘
사람아
아무려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 보이면 어때
바다밑 더 패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잠기는 걸
가 을 잠
네 이름에 이어진 건
여기 잠들어라
가을의 가슴 안에 쉬어라
죽을 뻔 죽을 뻔 그쯤이나 하다가
얼마 헐거워진
너를 풀어 뉘이련다
자거라 자거라,
잠의 노래 부르리라
가을이 이렇게 큰몸인 줄
내 몰랐어라
온누리 복되고 위안인 줄
내 몰랐어라
네 마음에 이러진 건
모두 잠들어라
어머니의 품이니 쉬어라
아흔아홉 가파른 고개
너를 등에 지고 온
여윈 빈 지게 비스듬히 세워두고
나도 잠들어 쉬련다
쉬련다
사랑이여
가 을 에 2
잎들이 진다
생명의 귀의(歸依) 그 유순으로
뛰어내리는 가을잎들,
하늘은 버릴 것을 만들지 않으시니
떨구이는 잎들조차
제뿌리에 순밀의 꿀을 따르고
어머니신 대지(大地)에
귀한 소금맛을 바치리
여름의 화로는
물의 신성(神聖)을 다 담아내고
재와 그스름도 씻어
오늘은
어린이같은 살결
가을이여
돌아온 딸들과 그네의 자식들의
축제일(祝祭日) 같음이니
신(神)은 지난 봄철부터
이들을 위해
짙은 단맛의 과물(果物)을
영글려 오셨니라
진실로
무엇을 더 바라리
마지막 시절에
꿈같은 처음으로
사람 하나의 그 항구(港口)에
나도 왔음을
저무는 날에
날이 저물어가듯
나의 사랑도 저물어간다
사라므이 영혼은
첫날부터 혼자이던 것
사랑도 혼자인 것
제몸을 태워야만이 환한
촛불같은 것
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 남기는
촛불같은 것
날이 저물어가듯
삶과 사랑도 저무느니
주야사철 보고싶던 그 마음도
세월따라 늠실늠실 흘러가고
사람의 사랑
끝날엔 혼자인 것
영혼도 혼자인 것
혼자서
크신 분의 품안에
눈감는 것
아 가(雅 歌)
가장 깊은 뿌리에서
아슴히 높은 정수리까지의
내 외로움을
사람아
너에게 드릴밖엔 없다
동쪽 비럿함에서
서녘끝 너메까지
한 솔기에 둘러 낀
하늘가락지.
돌고 돌아서
다시 오는
이 마음을
비 파 소 리
고요하지 않으면
이 비파소리 아니 들리리
바람 자지 않으면
이 기름등잔
불도 꺼지리
그 옛사람
옛날 인기척으로
목욕하고
머리 감고
이 가락 울려내어
옛날의 기도등(祈禱燈)
불 밝히누나
젊은 날
내 사랑은
장미가시의 사슬이더니
오늘 나의 사랑은
임의 발 앞에
임의(任意)의 신발을
놔드린다
비파소리여
비파소리여
타던 가슴
다 태운 후엔
편안하여라
비로소 알아듣겠는
비파소리는
눈물겨워라
바 다
바다여
나의 좋으신 분을
수평선 저 너메
네가 업어 뫼신 후
날마다
천도(天桃) 한 알을
상(床)에 올리네
즈믄 날
만경창파
머리 풀어 바치던
나의 제사(祭祀)
어느덧 서리 묻은
내 귀밑머리
어쩔라나
어쩔라나
오늘은
영혼 안의 그 바다에도
하늘복숭아
가지만 휘어지고
상 사(想 思)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골수(骨髓)에 전화(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겨 울 나 무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산울림도 울리려나
어이없이 울게 될
내 영혼 씻어내는 음악(音樂)
들려주려나
그 여운 담아둘
쓸쓸한 자연(自然)
더 주려나
아홉하늘 쩌렁쩌렁
산울림도 울리려나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겨울 그리스도
오늘은
눈 덮인 산야(山野)를 거닐으시네
눈같이 휜옷 입으시고
눈보다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앴날
물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광막한
수정의 빙판
바늘 꽃히는
한기(寒氣)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 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련한 추위에
물과 바다의
모든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寶血)을 섞어 빚은
새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 올리시는
설일(雪日)의 주님
화 답(和 答)
고요하여라
어린 초목(草木)들 위에
엉기는 이슬,
만상(萬象)향유 입히는 햇빛,
안개와 아지랑이,
비단실 솔솔 푸는
바람도
아무말 없어라
다만 고요하여라
천둥소리도 하나 없이
마음이 문을 열고
영혼과 영혼 사이
왕래의 길을 트느니
진실로
한 탄생에마다
아득한 날
이름과 축복을 예비하신
분께서
무량으로 생수(生水)를 따르심이로다
고통에조차 단맛을 섞으시며
귀하게 조율(調律) 하심이로다
고요하여라
소리내는 순서들은
저만치 지나가고
느낌과
뜻과
대답으로 간절한
침묵뿐이로다
봄 에 게
1
아무도 안 데려오고
무엇 하나 들고 오지 않은
봄아,
해마다 해마다
혼자서 빈 손으로만
다녀가는
봄아,
오십년 살고나서 바라보니
맨손 맨발에
포스스한 맨머리결
정녕 그뿐인데도
참 어여쁘게
잘도 생겼구나
봄아,
2
잠시 만나
수삼년 마른 목을 축이고
잠시찰나에
평생의 마른 목을 축이고
봄햇살 질펀한 데서
인사하고 나뉘니
인젠
저승길 목마름만
남았구나
봄이여
이승에선 제일로
꿈만 같은 햇빛 안에
나는 왔는가 싶어
망 향(望 鄕)
바라보지마라
눈 감아도 환한
옥양목빛 하늘
이름 부르지마라
안 불러도 대답하는
마음의
산울림인 사람
반 백년 살아
이적지 중심이 안 잡히는
어설픔이언만
봄눈 다녀간 후
모든 추위 덥히는 아지랑이만큼은
가슴으로 알겠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지척에 숨소리 들리고
얼어터진 속살에까지
봄햇살 기름 붓는
이 세상 아름다와라
따뜻하여라
사랑이여
우리 사이 보고짐도 과분하고
고향인들 웬만큼은 떨어져 그리는 일
이나마도 복된 줄을
잘 알겠네
주 일(主 日)
주일은
마음 흡족하다
아이들의 푸짐한 단잠부터
엄마에겐 안식일의 행복
다른 날은
출항한 배들을 기다리는
해저문 항구(港口)만 같았는데
주일은
꽃을 둔 식탁에
아침 목욕을 마친 아이들을 앉힌다
밝고도 유순한 눈매가
태어나던 그날의
내 자식으로 돌아들 왔구나
주일은
어버이도 그 어버이를
첮아 뵙는다
풍금소리에도 이슬떨기가 맺히는
아버지의 성당(聖堂)에 들면
아뢸 말씀 차라리 없고
탄생의 날 벌거숭이 나를
바쳐야 한다고
이 한가지 알 뿐이다
일 주간은
작은 생애,
주일은
생금(生金)빛 창세기,
생명들이 눈뜨는
환희와 놀라움이
하늘에서 내려와
죄인의 온몸을 덮는다
제 2부
「동행」의 영원한 사랑
(아홉번째 시집.1980)
눈
천국엔 주일(主日)뿐인가
천국사람들아
비행기 타고 못 가는
하늘 꼭두에서
희디하얀 편지, 눈이 오네
이 세상에선 못 만드는 깨끗한 반짝거림
빛나면서 얼어버린 눈물
눈이 오네
천국엔 주일(主日)뿐인가
주일(主日)의 촛불 밝히어
주일(主日)의 풍금(風琴)울리어
조용하게 꿈꾸는 유순으로
눈이오네
아무 말도 못하겠는
그저 아득한 마음에
불의 밀씨 뿌리는 눈이 오네
깃을 치는 것을 치는
유리의 새떼 오네
연 금 술(鍊 金 術)3
사람아 너 어쩔래
연금(鍊金) 불가마에 십년 사철 불만 맨
불귀신이네
금은 아니 나고
금의 뼛가루 백회(白灰)뿐인 걸
별수 없이 나도 바람이나 날린다
눈먼 바람 나 홀려가면
금도 아닌 돌도 아닌
내 도령(道令)아
넌 어쩔래
망 부 활
4월(四月)엔
십자가(십자가) 생 형틀을 짜고
물오른 가시의 가시관(冠)을 엮는다
그러면
신(神)이 와 못박히신다
올해도
주님은 죽어주실까
성(聖)금요일,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고
살아서
살은 채로
실날같은 긴 보혈(寶血)
흘려주실까
올해도
주님은 절망해 주실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이해 나를 버리시옵니까고
아아 더 훨씬 절망 이상이다
목숨을 번제(燔祭)하는 사랑으로서만이
오직 이길 수 있는
슬픔
4월엔
십자가 새 형틀을 짜고
죽으러오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부활의
너무 밝은 새벽
그 먼저
사흘 낮 사흘 밤을 넘쳐
내 품에 안겨주실
절망의 하느님을
기다린다
아침 기도
목마른 긴 밤과
미명(未明)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香油)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毛髮)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 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드립니다
손
1
내 왼손을 위해
오른손을 또한 주시었다
두 손이 허공을 가르고 와서 만나니
이처럼 측은할 수란 없다
인습의 양손이
처음으로 피차의 의미를 깨쳐
땅끝에서 다가온
마지막 두 사람처럼
합장(合掌)하고만 있다
2
두 손으로
공손히 허공을 떠올리면
무량공중(無量空中)의 한낱 제상(祭床)이다
이로써 저의 전부이옵니다고
온몸으로 아뢰인다
정갈한
바람의 제주(祭酒)
3
어루만질 게 없는
여자의 손은
사람의 몸에서 제일로 외롭다
천지만물 중에서도
제일로 외롭다
생 명(生 命)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땅에 꽃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充電)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傷)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연(鳶)
연(鳶) 하나
날리세요
순지(純紙) 한 장으로 당신이 내거는
낮달이 보고파요
가멸가멸 올라가는
연실은 어떨까요
말하는 마음보다 더욱 먼 마음일까요
하늘 너머 하늘가는
그 마음일까요
겨울하늘에
연 하나 날리세요
옛날 저승의 우리집 문패
당신의 이름 석자가
하늘 안의 서러운
진짜 하늘이네요
연 하나
날리세요
세월은 그렁저렁 너그러운 유수(流水)
울리셔도 더는 울지 않고
창공의 새하얀 연을
나는 볼래요
비
내 유정한 시절
다 가는 밤에
억만 줄기의 비가 내린다
세월의 밑바닥에 차례로 가라앉는 비
물살 휘저으면
뭉기고 고쳐 쓰는
글씨
내야
예쁜 죄 하나 못 지었구나
저승과 이승, 몇 겁 훗세상까지
못다 갚을 죄업(罪業)을
꼭 둘이서 나눌
사람 하나
작정도 했거마는
빗물에 손 씻는다
죄 하나라도 운명 없이는
이루지 못함을
찬미할거나 찬미할거나
오늘은 골수(骨髓)에도 스미는 비를
내멋대로 찬미할거나
그래 참말이다
피가 더운 여자는
단명이나 했어야
하는 것을
바 람
바람 부네
바람 가는 데 세상 끝까지
바람따라
나도 갈래
햇빛이야
청과(靑果) 연한 과육(果肉)에
수태(受胎)를 시키지만
바람은 과원(課園)변두리나 슬슬 돌며
외로운 휘파람이나마
될지말지 하는 걸
이 세상
담길 곳 없는 이는
전생이 바람이던 게야
바람이 의관(衣冠)쓰고
나들이 온 게지
바람이 좋아
바람끼리 훠이훠이 가는 게 좋아
헤어져도 먼저 가 기다리는 게
제일 좋아
바람 불며
바람따라 나도 갈래
바람가는 데 멀리멀리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
촛 불 1
1
촛불아
나의 어느 사랑노래로도
노래 너머 첩첩 산길 더욱 가는
그 사랑으로도
나의 삶 전부로도
불타고 재도 없는
너를
못 이기겠다
2
환하게 환하게
내 영혼을 지나가는 이의
지나만 가시어도
눈물나는 이의
바람도 못 흔드는
주홍(朱紅) 옷자락
6
한 덩이 백랍
불 만나 기름되고
맑아져 증류수되었다가
다시 엉기어
기름되고 백랍되어
봇은 몸이 또
불붙네
7
옛날의
외롭던 사내아이와
외롭던 여자아이가
외로운 버릇대로 그냥 자라나
외로운 긴 세월 차례로 섬겨
이렇도록 늦은 날에
만났습니다
촛불 한 자루
예 밝히오니
조물주신 어른
소람(昭覽)하시옵소서
8
한번도
여자를 안아보지 못한
신선(新鮮)한
이 서투름을,
아아 동정(童貞)의
불심지
9
물속
천길 만길에
금두레박 타고 온 이는 없다
찬물찬물 밑바닥에
추워서
눈먼 여자
찾아준 이는 없다
너밖에는
10
지금 막
씻어 행군 영혼일 땐
촛불 육신(肉身)
가득한 방에
옷 벗고
혼자 든다
13
승천(昇天)한
촛불들은 별이 되었나요
별이 되어
밤새도록
빛의 비를
내리나요
촛 불 2
15
면도날로
불송이 자르며 운다
잘린 불송이
서로 이어붙는 거
한없이
눈물난다
16
몸 비추는
불빛일랑 말고
마음 비추는 불빛도 말고
너의 영혼
그 옆방의
빛그늘되고지고
18
천일(千日)을 보고싶던 이
천일을 오시쟎은 이
창호지에 여린 불빛 적시며
등불 설핏 비추면
천일 몇 갑절에도
나는
문 열을래
21
잠자려마
잠자려마
평생에도 잠 없는 순금(純金)의 눈시울
사랑처럼
고단한,
아아 죽음에만 눈감는
촛불
22
너만
울리진 않아요
혼자 노숙(露宿)하겐 결코 못해요
촉구(燭淚) 모두 불이 되는
너를
나 죽은 후라도
투명한 내 몸이
안아줄 거예요
24
둘의 영혼
다 열리옵고
그 다음은 촛불같게 하소서
고요함과
불타는 일만을
알게 하소서
새 봄 감 상(感 傷)
나를 불러 주시어요
가지 마라고 일러 주시어요
일년 내내 수도물같이 쓰는
세상 사람들의 그 말
사랑이라고도 부디 말씀해 주시어요
가지 마라고 손짓해 주시어요
한달 전 떠난 겨울이
외로운 눈짓으로
돌아서서 있다
산 3
산이라 하나
구름밭에 솟으신
천길땅에 잠기신
나의
어른은
산이라 하나
절망처럼 충직(忠直)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산정기(山精氣) 쏟아주시는
나의 어른은
제 3부
「사랑초서」의 연연한 그리움
(여덟번쨰 시집. 1974)
사 랑 초 서(草 書) 1
사랑하지 않으면
착한 여자가 못 된다
소망하는 여자도 못 된다
사랑하면
우물곁에 목말라 죽는
그녀 된다
사 랑 초 서 11
마음에 대답하는 마음
영혼에 산울림하는 영혼
이를 생각만 해도 나는 운다
굶주렸고 바보인
아이처럼
사 랑 초 서 18
새벽에 그가 온다
그의 가난이 문을 두드린다
이날의 두 낱의 가난이 만나
해로의 한 연분을 맺은 외엔
더 아는 것이라곤 없다
사 랑 초 서 20
저무는 날 해어스름
박명(薄明)의 아름다움을 안다
안개 너머 벙그는
별들을 안다
사랑하기 전엔
몰랐던 빛을
사 랑 초 서 26
구천(九天)에라 머리풀고 부르면
죽은 사람도
넋이야 한번 온댔는데
있는 머리 다 풀은
지금이 그때인데
사 랑 초 서 29
석양(夕陽)
불지른 하늘이여
이 사랑, 한 제상(祭床)으로 거두시면
첫날 흙 한 덩이의
영일(寧日)에
돌아가올 걸
사 랑 초 서 34
평생에 그 하나
손 안댄 죄를
죄 지으려면 그대와 나눠야지
마른 날 불벼락의
모진 천벌도
그대하고 나눠야지
사 랑 초 서 44
하늘이 못 주신
사람 하나를
하늘 눈 감기고 탐낸 죄
사랑은
이 천벌
사 랑 초 서 48
사랑은
동천(冬天)의 반달
절반의 그늘과 절반의 빛으로
얼어붙은 수정이네
사 랑 초 서 55
한바다 수심(水深)을
혼자서 다 뎁히는 사람
물결 하나하나
신령붙여
보내는 사람
사 랑 초 서 60
위대한 해가
선지피 큰 바다로
몸을 풀듯이
새날의 아침해로
거듭 솟듯이
사 랑 초 서 66
사랑의 선(善), 사랑의 가책에도
진실로 지쳤다
사랑의 신(神)이
주무시는 까닭을
오늘 안다
사 랑 초 서 69
가시와 꽃들이
불타는 곳에
내가 재 되는 줄 알면서
아프면서 기쁘면서
그대와 불타는 곳에
사 랑 초 서 83
사랑은
정직한 농사
이 세상 가장 깊은 데 심어
가장 늦은 날에
삭을 보느니
사 랑 초 서 86
내 사랑 용서하시오면
임의 사랑 용서 바치오리
일월성신(日月星辰)
즈믄 날에
황송하고 고맙고
죄지은 마음
사 랑 초 서 88
나는
미운 질그릇이나
임의 불 담는 화로이고 싶어
분수에도 과한
옥동자 배고 싶어
제 4부
「설일」의 먼먼 그리움
(일곱번째 시집. 1971)
오 늘
1
눈오는 강물을 바라본다
아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범부(凡婦)의 노래
1
바다는 큰 눈물
웅얼웅얼 울며 달을 따라가지
그 눈물 다 가면
광막한 벌이라네
바다는 그저 눈물
눈물이 더 불어 누워 돌아오지
그리곤 또 가네
몇 번이라고 달 때문이네
2
이 바람을 어이랴
실바람 한 오락지 살갗에만 닿아도 사람내음에 절은 머리털 한웅큼에
열손가락 찔러녛듯, 진홍의 관능에 몸서리치며 내 미치네
이적진 몰랐던
이리도 피가 달아진 일,
아아 바람에 바람에
이 살을 다 풀어 주어야
내가 살겠네
3
사랑만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못해 줄
지금 세상의 사나이를,
신(神)이 한 가지만을 주신다면 하면
나는 역신 한 남자를 갖겠다
패전(敗戰)한 국민이 소리를 모아 부르는
국가(國歌)의 절망과 그 소망을 품겠지
편 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ㅇ르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내가면 글썽
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귀절 쓰면 한 귀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머리를 빗으며
머리를 빗는다
이밤
해일 수 없는 어둠의 실오락지를 벗어내리듯
단념(丹念)히 머리를 빗질한다
포실한 모발
올올이
순묵(純墨)의 윤광(潤光)이 맻히는 건
사람의 사념 그리도 어두운 탓인가
난로에 기름을 더 준다
소리지르며 불타는
순수(純粹),
마치도 충실을 아는 두 영혼이 만나
서로 한없이 껴안은 광경이다
가능의 여명(黎明)을
불의 불무더기로
처염(凄艶)히 불사룬 정신사(精神史)를
인류는 가지고 있고
실상 충실을 익히는 일 그쯤에 쓰기론
누구도 그 시간이
적었다고야 못하련만
유한 수압을 가르며
심해어족(深海魚族)의 지느러미를 빗질하듯
긴 머리를 빗으며
이 밤 나는
쫓겨난 여자처럼 춥다
아 가(雅 歌) 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 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나
네게로 가리
성 모 승 천
어머니께서 하늘을 오르신 길은 어디오니까
하늘 명명(明明)한 데서
몇 번이고 거듭 저희께 오시는 그 길은 더욱 어디오니까
눈물 안에
작은 소망과 먼 기다림이
이른 봄 실바람으로 커가는 곳에,
나직한 말씀조차 아니고
보다 오묘히 그 위로를 숨기시는
달고 어진 침묵 안에,
무시로 밤에도 오시며
임종의 침상(枕上)에마다
일일이 특별한 애련으로 지켜보시는
어머니
하늘의 빛보래를 갈라
흰 강물, 은하의 후광으로 흐르게 하시고
한도 없는 도정(道程)을
무량한 시간을
억천만 번이나 저희께 오시다니
아아 승천만으로도
너무나 눈부심을
하늘에서 길 떠나 땅으로 오시는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 놀라운 사랑이 웬일입니까
가 을 2
어느 때
침묵의 전령(傳令)이 와서 내 안에 머물었다
말없는 세계, 무변한 벌판에
내가 살았음은 그 때문이지
안으로 더 안으로
줄곧 검은 층계를 밟아 내리던 어둠의 충동
무엇 때문에 그래야만 했었는진
나 자신 아는 바도 없다
흐르는 사계(四季)
그건 기다란 몸짓으로 드러눕곤 했는데
어느 것이나 침묵의 봉인(封印)에
가을이 왔다
하늘에서 시든 잎들이 흘러내리고
공중의 배가 침몰하듯
아찔한 무게의 사유(思惟)가
쏟아져 오고
참 이상하지
소리에 굶주리던 만상(萬象) 한가운데
갑자기 음악이 흘러 넘쳤다
다른 일도 또 있다
청징(淸澄)한, 선인(仙人)들의 시심(詩心)이
순금의 망사를 짜서
천지 사방에 걸어두는 일이.
저들이 내쏘는 빛의
한 줌 여광(餘光)을 두 손에 받으며
울어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가을은 지금이 그 시작이다
제 5부
「겨울 바다」의 청아한 메아리
(여섯번째 시집. 1967)
설 동 백(雪冬柏)
내가 불러서
예까지 오신 분
닫긴 문 사이로
설동백 한 가지를 드리오니
받아 가옵소서
아기를 잉태해본 몸으로
말하자면 인생의 전중량 그 기막힌 숙명(宿命)을
한몸 남김없이 품어본 몸으로야
사랑을 주려면
자그만치 대보름달 달덩어리만하여
무섬증만 나요
진종일
호스터의 합창
이 도취와 전율
어린것이 자라면 그애들이랑
애아버지가 돌아오면 애아버지랑
물빛같은 정으로 살까
서러운 나는.....
내가 불러서
내 문앞에 오신 분
저 황송한 배회
오랫동안
무지개 서로 눈물
저 외로운 뒷모습
아아 너무 커서 차라리
눈 감은 사랑
이 소중한 여광(餘光)
검은 머리 한웅큼 잘라 바치듯
설동백 한가지를 드리오니
받아 가옵소서
물 망 초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 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잊으려 원하시며는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 잊는 꽃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이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의
큰 배 같던 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빛 연보라는
못 잊는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겨 울 바 다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은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하 일(夏 日)
날이 날마다
섬세한 날개짓으로 날아가고
돌아오는 새야
비 속에도
번개 속에서
산탄(散彈)처럼 내닫더니
오늘은 날개를 접어
한더위 긴긴 해
고단한 하루
부채로 바람을 일구어
눈썹이 시원한
아가는 잠들어
아무 일도 없는데
초록이 무거워서
솔잎 하나마저도 흔들지 못하는
나무, 나무, 나무들
마법의 고요
소나기같이 온
현기증에 이마를 짚고 서면
새야
새야
내 영혼 그 안에서
사막을 가는구나
은 혜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주시던 날
그날 하루의
은혜를
나무로 심어 숲을 이루었니라
물로 키워 샘을 이루었니라
처음으로
나에게
너를 그리움이게 하신
그 뜻을 소중히
모든 걸 소중히
외롬마저 두 손으로 받았니라
가는 날 오는 날에
눈길 비추는
달과 달무리처럼 있는 이여
마지막으로
나에게
너를 남겨 주실 어느 훗날
숨 거두는 자리
감사함으로
두 영혼을 건지면
다시 은혜이리
기 쁨
1
이 기쁨 처음엔
작은 꽃씨더니
밤낮으로 자라 큰 기쁨이 되고
위태한 꽃나무로 섰네
아, 이젠
불이어라
가책의 바람으로도
끌 수 없거니
2
새벽잠 깨면
벌써 출렁여 있는 마음
한 쌍의 은행(銀杏)같이
연한 슬픔과 또 하난
기쁨이래요
말하지 말아야지
나 이번엔
죽도록 말하지 말아야지
좌르르 하늘이 쏟아지던
옛날의 그 한마디
이 마음의 이름
아가야 우리도
아가야 우리도
바다에 가면
다리 긴 네 아빠가
바다에 있더란다
면밀한 광채
검은 눈매의
우리 아기 보배아기 바다 뵈줄까
아무래도
아가야 바다야 가련
한 눈 보곤
영 못 본 그 아저씨가
해풍에 팔을 벌린
범선(帆船)으로 계실지
먼발치 저만치서
눈여겨 살펴 보기
가람 찾는 버릇에
엄마는 늙는댄다
숨어서 숨어서랴
밤마다에 섰다가
적멸한 해심(海心)을 후비고 가는
눈먼 메아리나
되어 보련
허(虛)
.....어둡다
내 영혼이 등불을 껐을까
천 길의 물밑은
벗은 가슴은
얼고 얼어 유리(琉璃)가 되었을까
눈물도 많으면
바위까지 뚫는데
가난한 나는
눈물도 사랑도 너무 적었을까
말은 가지 끝의 잎새
생각만이 병(病)으로 깊어져
묵언(默言)의
밀밭되고
사람을 구하느라 죽으신
야훼의 그 아드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내 이름의 방(房)들이 잠기고
열쇠를 잃었으니
한일도 없네
한일도 없네
곤전도(坤殿圖)에 부쳐
추운 물오리처럼
연(蓮)이 폈네
시린 물결에 속살 담그어 펴 울리는
수련(水蓮)의 마음을 뉘 읽으리
연당 끼고
둥근 옷섶인 양 더욱 가는 곳
궁궐 지밀 안
아 심심유곡(深深幽谷) 샘물같은
여심(女心)을 뉘 읽으리
무릇 높은 이름치고
뼈 마디 마디
한(恨)으로 멍들지 않은 이 있었을까
그 이름
황국(皇國)의 곤전(坤殿)일래
시름도 하 많은지고
은바늘이 기워가는 당홍단(唐紅緞)
낱낱의 바늘 자욱
피가 묻어
감싸고 감싼
백옥의 가슴에는
하늘도 못다 헤일
정한(情恨)이랴
천형(天刑)이랴
봄 뜨락 고요 속에
황의홍상(黃依紅裳) 큰 머리의 용잠(龍簪)도
쓸쓸히 은회(銀灰)빛
그림자를 뉘었네라
가을 햇볕에
보고 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찢고 나오는
비둘기떼들,
들꽃이 되고
바람 속에 몸을 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제 6부
「풍림의 음악」의 단풍연가
(다섯번째 시집. 1963)
여 인 애 가(女人哀歌)
1
먼저 견디면
나중엔 편하니라
젖가슴을 쑤시는
은바늘 끝에
진다홍 핏방울은
눈물이듯 삭이고
수정빛 눈물이면
이슬 보듯 보아라
창천에
해 아니 솟는대두
정을 준 건
잘했니라
2
너 가지 마라
노래 지어 불러 줄께
너 가지 마라
자식 낳아 길러 줄께
손톱 손톱
다 딿도록
너만 보고 살고지니
너 가지 마라
이 세상도 나랑 살고
훗세상도 나랑 살자
3
돌기둥이라도 됐더면
하늘에나 뻗쳐둘 걸
치미느니 통곡이라
눈물 기두이사 어디다 세우나
새야 새야 파랑새야
슬픔의 새도
가고사 아니 오네
천리 길 모랫벌은
띄약볕 천지던 걸
못내 죽은 메아리 하나
그를 불러 날 보랬지
사랑도 사랑도
내 사랑은
하늘 한 조각을 못 얻어
섧다네요
4
제 좋대믄 보내련다
제 간대믄 보내련다
내야 저 없이 사노라면
속 쓰려 눈 멀겠네
예쁜 색시 얻어서나 산대믄야
검은 머리 희도록에
검은 머리 희도록에
아들 장가
보낸 셈 치지
아 가(雅 歌)
하늘도 제일 높은 하늘에까지
너를 부르는
한 목소리뿐이다
선물로 받은
햇빛이라 여기며
비라 여기며
나날이 더운 손 잡아주며 산다
사랑을 가진 나는
진작에 몰랐던
눈물과 진실
너로 해 생긴 근심도 소중해라
사랑을 가진 나는
바다도 제일 깊은 바다에까지
너를 부르는
한 목소리 뿐이다
선물로 받은
빈 자리라 여기며
외롭다 여기며
약손 얻어 가슴 쓸어내리듯 산다
아아 내 눈이 본
가장 놀라운 빛으로
몸이 빛나고
영혼이 빛나는 너를
죽도록의 냐가 보고 싶은 마음도
훗세상에 심어
뿌리깊은 연분의 나무 될
기도에 바치고 나면
따의 제일 먼 따끝에까지
너를 부르는
한 목소리뿐이다
임
1
임의 말씀 절반은
맑으신 웃음
그 웃음의 절반은
하느님거 같으셨다
임을 모르고 내가 살았다면
아무 하늘도 안 보였으리
2
그리움이란
내 한몸
물감이 찍히는 병
그 한번
번갯불이 스쳐간 후로
커다란 가슴에
나는
죽도록 머리 기대고 산다
3
임을 안 첫 계절은
노래에서 오고
그래 만날 시만 쓰더니
그 다음 또 한절은
기도에서 오고
그래 만날 손 씻는 마음
어제와 오늘은
말도 잠자고
눈 가득히
귀 가득히
빛만 받고 있다
너를 위하여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5월 연가(戀歌)
눈길 주는 곳 모두
윤이 흐르고
여른여른 햇무리 같은 빛이 이는 건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듯 홀로인
사양(斜陽)의 창가에서
얼굴을 싸안고 눈물을 견디는 마음은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발돋움하며 자라온 나무들
땅에 드리운 그 눅진 그림자까지
초록빛 속속들이 잦아든
오월
바람은 바람을 손짓해
바람끼리 모여 사는 바람들의 이웃처럼
홀로인 마음 외로움일래 부르고
이에 대답하며 나섰거든
여기 뜨거운 가슴을 풀자
외딴 곳 짙은 물빛으로
성그러이 솟아 넘치건만도
종내 보이지 않은 밤의 옹달샘같이
감청(紺靑)의 물빛
감추고
이처럼 섧게 물타고 있음을
내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도 쉬게
이 슬픔
기름으로 부어
불을 켜게 하롭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머지의 눈물
오늘은 눈물을 용서하시고
번뇌를 용서하옵소서
여인의 생애는 기다림으로 흐르는 강이옵니다
인내와 그리움으로 닦는
청동(靑銅)의 거울 이옵니다
.....아베 마리아
이 슬픔 익으면
그를 먹이는
술이라도 되게 하옵소서
옥빛 우물이라도
되게 하옵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며지의 고독
오늘은 고독을 허락하시고
위로를 허락하옵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머지의 피곤
오늘은 안식을 불러 주시고
편안한 긴 잠에
사랑도 쉬게 하옵소서
아베 마리아
모 상(母 像)
눈물이 많은 어머니로 말하면
눈물은
모성의 샘입니다
기다림에 사는 어머니로 말하면
시간 속에
모성은 섬입니다
하늘이야 차마
가난을 가르쳤으랴만도
굶주리는 어린애를 품에 안은 어머니에게
가난은 모성의 벌(罰)입니다
한평생 서릿발같던 노염도
마지막 길엔 풀고 가거니
용서는 모성의 화환(花環)입니다
세상엔 허구많은 이름이 있건만도
그 무상(無償)인 사랑의 의미에서
그 소소(素素)한 미소의 의미에서
이에 견줄 건 또 없으리
망각에 못 박으면
먼 세월 요요한 별밭에
다시 피어 오르리니
모성은 고독한 은총의
그 등(燈)입니다
내가 흐르는 강물에
구름은
하늘이 그 가슴에
피우는 장미
이왕에
내가 흐르는 강물에
구름으로 친들
그대 하나를 품어가지 못하랴
모들 걸 단번에 거는
도박사(賭博師)의 멋으로
삶의 의미 그 전부를
후회없이 맡기고 가는
하얀 목선(木船)이다
차가운 물살에
검은 머리 감아 빗으면
어디선지
울려오는
단풍나무의 음악
꿈이 진실이 되고
아주 가까이에 철철 뿜어나는
이름 모를 분수(噴水)
옛날 같으면야
말만 들어도 사랑과 어지럼병
지금은 모든 새벽에 미소로 인사하고
모든 밤에 침묵으로 기도한다
내쳐 내가 가는 뱃전에
노란 램프로 여긴들 족하리라
이왕에
내가 흐르는 강물에
바람으로 친들
불빛으로 친들
그대 하나를 태워가지 못하랴
서 설(瑞 雪)
눈이 온다
손시린 흰빛의
나비들
우렁찬 고함처럼 잘 들리는
갑작스런 음악
이 황홀한 소낙비
눈이 온다
마법의 옷 갈아입는
하늘
불이 보고 싶어라
네 영혼이
눈물이 보고 싶어라
네 영혼이
사랑하지 않고는
잠시도 살지 못하는 이 피곤한 영광
이 줄기찬 미혹(迷惑)
눈이 온다
마음껏 채광(彩光)에 몸 적신
나비들
제 7부
「정념의 기」를 흔드는 마음
(네번째 시집. 1960)
후 조(候 鳥)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마주 불러볼 정다운 이름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오랜 이별 앞에 섰다
갓 추수를 해들인
허허로운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긴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삶의 백가지 간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음이라
눈 멀듯 보고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이 없는 그리움의
벌(罰)이여
이 타는 듯한 갈망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같이 늙어진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서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 그 옛날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애뜯는 한 마음이 있었더니라
이렇게 죄 없는
얘기거리라도 될까
우리들 이제
오랜 이별 앞에 섰다
가을의 기도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당신 앞에 벌받던 여름은 가고
기도와 염원으로 내 마음을 농익는
지금은 가을
노을에 젖어
고개 수그리고
긴 생각에 잠기옵느니
여기 이토록 아름차게 비워진 나날
가을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기도드리게 하옵소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불리우다 불현듯 더워오는 눈시울
주체할 길 바이 없느니
이제금 홀로인 그 분과 나와
가을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보다 경건히
적요의 눈짓으로 마주 바라보는
계절은 가을
신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그분과 나 사이에
한아름의 들국화를 두게 하옵소서
보라빛과 흰빛의 소담스런 국화가
피어도 있고
피면서도 있게 하옵소서
가을은 돌아가는 계절
푸른 하늘 아래
나도 몰래 내가 멈춰서는 계절
문득 멈춰서서 다시 보면
나는 혼자인 나
가을은 저마다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돌리옵소서
마지막 장미
지숨한 정에 넘치고
애오라지 잘 되기를 비는
연한 새순같은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주겠는가
반생을 지운
삶의 산마루에서
불현듯 느껴오는 보라빛 광망의
달밤같은 그리움이 있다면
누구에게 주겠는가
순은 뻗어 잎새 무성하고
머쟎아 눈무신 꽃숭어리를 펴 바칠
기찬 동경과 바라옴으로
검은 살눈썹이
젖어든다면.....
여인이여
우리 생애에서 가장 쓸쓸한 시간이
언제 올지는 모른다
생명의 잔을 비우고 돌아가는 길은
우모인 양 내려 쌓이는
하얀 눈벌일지도 모르는데
숙연하여 몸서리칠 그때
마지막 누구의 이름을
부르겠는가
여인이여
도금한 금붙이의 값싼 자랑이나
지난날의 치의스런 욕망들을
흘려버리고
씻은 구슬같은 마음밭에
하나의 사랑만이
있는 대로의 깊이로 깃들인다면
그 사랑을 누구에게 주겠는가
한 송이의
뜨거운 장미,
마지막인 장미를
가진다며는
아가와 엄마의 낮잠
아가 손 쥐고
아가 함께 엄마도 단잠 자는
눈어린 대낮
아가 얼굴이사
물에 뜬 미끈한 달덩이지
눈이야 감건 말건
훤히 비치는 걸
조랑조랑 꽃이 많은 꽃묶음이나
잘 익은 과일들의 과일바구니 모양
연방 흘리는 단내나는 살 냄새
아가의 향기
꿈결에도 오가느니
아가 마음과 엄마 마음
금수레에 올라탄 메아리라 부르랴
사락사락 입맞추는
봄바람이아 부르랴
아가 한 번 눈떠 보면
엄마도 잠이 깨고
아가 방긋 웃어 주면
엄마 가슴은 해돋이
창호지 한 장 넘엔
누가 오고 누가 가건
우리 아가 옆 자리는
엄마의 낙원
고 별(告 別)
낙엽은 가을의 수기(手旗)
저리 흔들며 이별을 고한다
안녕히,
당신이 떠나는 길머리에
나도 작은 손을 흔들어 주마
가을은
뜨거운 마음을 숨기고
헤어지는 계절
버려진듯 서 있는 이정표(里程標)앞에서
아픈 이별을 견디는 때란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함으로 하여
보내는 계절이란다
화평한 영혼은
신이 켜 주시는 성총(聖寵)의 등불
그 불빛 당신께 있으라
빌어 주마
사랑하면 무엇이나 주고 싶어진다
평생 바치며 살고 싶어진다
당신은 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나뉘는 일도 주는 거란다
더 섧게 더 많이 주는 거란다
당신은 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작은 손을 흔들며
하얀 꽃이파리만큼
웃음 지어 볼까
사랑은
멀리서도 가까이 사는
마음이라고 믿자
달 밤
잠든 아가의 손을 쥐어 본다
흰 이마 귀여눔 귀뿌리에 달빛이 머문다
달은 둥근 얼굴의 고요한 마음씨
눈썹으로 해서 나의 살결에도 스미느니
달빛이 댕기면 피부가 정결해지고
정결한 피부가 속으로 순화(醇化)의 깊이를 포개면
이로써 고운 꽃물이
적셔질지도 모르는데
아가 머리맡엔 흰 석고의 성모상
성모의 발이 출렁이는 물 속에처럼
달빛이 잠겨 있다
잠자는 것들은
좋은 술에서처럼 잠에 취하는 시간
잠자지 않는 건
눈썹을 깜박이며 모여들 온다
내가 나눠져서
몇 개의 분신으로
만나는 시간
숨겼던 사랑을 차고 오는 나와
미진한 염원에 가슴이 더운 나와
가책의 질고를 앓고 잇는 나와
이렇게 여럿이서
원탁(圓卓)을 둘러앉는다
달은 둥근 얼굴의 상냥한 마음씨
닫힌 유리창을 넘어 와서
나의 눈앞에 유백(乳白)의 등(燈)을 건다
요람의 노래
우리 애기는 귀여운 열매여요
엄마 나무에 열린
엄마 나무의 귀여운 열매라고
불러 주세요
버려져 이름도 잊힌
외로운 섬에
아롱아롱 걸려 잇는 무지개오니
우리 애기는 엄마의 무지개라
불러 주세요
우리 애기는 어여쁜
언제나의 그 애기언만
엄마의 가슴에선
풋풋한 사랑이 날마다
새로 피어나요
우리 애기는
엄마의 거울이라
불러 주세요
새맑은 두 눈의 눈 빛을 헤치면
속속들이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있으니까요
우리 애기는
엄마의 전부라고
불러 주세요
촛불이 없는
빈 촛대라며는
엄마는 얼마나 가엾겠어요
남김없이 부어 준
빈 잔
우리 애기는
엄마의 전부라고
불러 주세요
정념(情念)의 기(旗)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 앉은
하얀 모랫벌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너 에 게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라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저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빛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 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라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을의 노래
"나 그만
알리지 않고 다녀갑니다"
밤에 이러한 말소리가 들려 온다
"어째도
그만 알리지 않고
이대로 영 가렵니다"
이렇게도 말하는 것이다
더 깊은 밤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구 가라신 말씀으로
단풍 한 잎새만한
불을 댕겨 주는 이도
지금은 없는데
사위어가는
가슴 속 새하얀 잿더미는
무억을 불사른
무(無)의 형적(形跡)일까
사랑하며 번민하는
더운 눈물쯤이야 흔하기도 할텐데
내겐 그것도 없다네
"나 그만
알리지 않고 다녀갑니다"
가랑잎이 지는 밤이래서일까
오랫만에 슬픈 환상이 있어
사치스런 시간이다
조그마한 숨소리로
마른 잎과 잎들이 모이는
음향 속에
은은한 메아리로 울려오는 소리
"어째도 그만 알리지 않고
이대로 영 가렵니다"
메리 크리스머스
거룩한 그 아기의
이제금 새로운 영혼의 여광(餘光)이다
메리 크리스머스
벗이여
오늘 밤 성당 돌칭계서
환한 네 얼굴 보여 주지 않으련
기도하러 가는 마음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너 함께
내가 있었으면 한다
세상에 나서
아직 기도를 올린 적 없다는
너의 오히려 나를 울린
우애의 그늘에서
내가 부끄러워
지금은
천주이신 아기께서 잠드신 시간
정결하고 광휘로운 이 시공 속에
우리의 마음을 새겨
종이나 빚었으면
속에서 넘쳐나는
정밀한 강물 모양
외로움이 일 적에 울어 주는 종
보고짐이 일 적에도
울어주는 종
벗이여
촛불을 켜 들고
유리창 비쳐보는
꽃가게같은 너여
메리 크리스머스
하늘에선 흰 눈을 내려 주십시오
펄펄펄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
눈인 양 새맑은
소망의 가(歌)를 울리게 하십시오
메리 크리스머스
놀라운 밤이다
빗물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 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제 8부
「나무와 바람」의 갈림길
(세번째 시집. 1958)
무 심(無 心)
산들바람 한 오리의 손짓으로
꽃잎들은 검은 땅에 뛰어 내립니다
어느 건 연분홍 패각(貝殼)의 빛깔
어느 건 눈이 부신 백합의 살결
더러는 불송인 양 타기도 하고
산들바람 한 오리의 손짓 속에
절로 오는 꽃의 내음
절로 가는 세월의 한때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의 모습이랴
사람의 마음이랴
어느 게 무엇일래 더 외롭고
어느 게 무엇일래 덜 설우랴
산들바람 한 오리가
덪은 그곳에
꽃잎들은 꽃잎들은
단잠 듭니다
아 가 에 게
1
아가의 머리맡에 햇빛이 앉아 놉니다
햇빛은 아가의 손님입니다
아가가 세상에 온 후론
비단결같은 매일이었습니다
아직 눈도 아니 뵈는 죄그만
우리 아가
아가는 진종일 고이 잡니다
잠은 아가의 요람
아가는 잠에 안겨 자라납니다
아가는 평화의 동산
지줄대는 기쁨의 시내입니다
아가는 엄마의 등불입니다
아가 함께 있으면
훤히 밝아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2
아가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갓난 어여쁜 병아리며 강아지에게
이름이 없듯이
아가도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새벽이라 밤이라
으스름 저녁이라
허구많은 글자 속에 찾고 또 찾았건만
아가를 부를
아가처럼 귀여운 글자
없었습니다
하늘의 별밭
바다 속 진주 더미
아가의 이름을
어디서 얻어올까
아가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머나먼 나라에서 처음으로 보내 온
파란 새 흰 꽃의 이름을 모르듯이
아직 우리 아가 이름을 모릅니다
사랑한 이야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 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블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길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무 제(無 題)
그 어디 한적한 섬으로 가도 좋다
게서 영영 산대두 좋다
돌아가는 백년 달빛과 너만이 타고
구애 없는 해풍 함께
나만이 거기에 남는대두 좋다
너의 성명이 무엇이면 어떠리
너의 고향이 마무데면 뭐라나
죽어야 할 만치 슬픔이 있다는 점으로
넌 무작정 내 마음을 끈다
우리가 삶에게 바랐던 거란
고맙고 행긋한 한 줌의 인정
병석에서 목마른 아내라며는
한 그릇의 냉수를 사랑으로 먹여 주는
남편 있음으로 족하다 했었니라
건강과 이해와 믿음
그렇다, 결코 많은 걸 원하지 않았었다
손목에 감기는 쇠사슬을 풀어내듯
엄청난 배리(背理)를 끊어 버리라니
어디 한적한 섬에라도 가자
게서 겨웁도록
네 슬픔을 품어 주마
장미를 피우득
파랗게 언 유리창에
장미를 피우듯
고운 촛불을 밝혀 둡시다
창 밖은 사뭇 휘몰아치는 눈발
벗은 나무 가지들
찬 바람 속에 흐느끼며
거친 등결 밑에 무수히 금긋는
아픔을 앓는 밤이옵기에
막 피어나는
장미 빛 등불을 밝혀 두며는
저들을 위해 자비스런 축도(祝禱)
우리에겐 소리 없는
갈채도 되리니
파랗게 언 유리창 앞에서
당신의 흰 손을 나에게 주십시오
바깥은 이적지 분분한 백설이나
첩첩한 물결 위를 넘어 오는 물새 모양
어디메쯤 오고 있을
회춘(回春)의 노래
연연한 첫가락을
맨먼저 그 손에
감아 드리리니
파랗게 언 유리창에
장미를 피우듯
고운 촛불을 밝혀 둡시다
인 인(隣 人)
보이지 않는 고운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보이지 않게 곱고 괴로운 영혼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영혼이
네게 있고
내게도 있었느니라
그것은
인기척없는 외딴 산마루에
풀잎을 비비적거리며 드러누운
나무의 그림자 모양
쓸쓸한 영혼
쓸쓸하고 서로 닮은
영혼이었느니라
집 가족 고향이 다르고
가는 길 오는 길 있는 곳이 어긋나도
한바다 첩첩이 포개진 물 밑에
청옥빛 파르름한 조약돌이
자지런히 동그랗게
눈뜨고 살아옴과 같았느니라
영혼이 살고 있는 영혼들이 마을에선
살경이 부딪는 알뜰한 인인
우리는 눈물겹게 함께 있어 왔느니라
짐짓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곱고 괴롭고 그리워하는 손짓으로
철따라 부르는 소리였느니라
철 따라 대답하는
마음이었느니라
네 생각 그 하나에
너를 재우고 돌아서던 손시린 돌무덤에
이제 나도 영원히 쉬려고 찾아온 거다
별이란 그저
잠잠히 순명하는 광망(光芒)이더구나
새삼 무에랴 우리를 일깨워
섧게 만드리
안식할 것으로 믿자
너를 불러 네 옆에 이처럼
나 돌아왔음은
진실로 하늘이 짚어준 길이었거니
무서리 내 가슴에 잠기고
흰 눈깨비 성성히 덮여오는
경루 한밤에도
오직 네 생각 그하나에
나는 살았더니라
제 9부
「나아드의 향유」에 핀 고결한 꽃
(두번째 시집. 1955)
나아드의 향유(香油)
거친 돌틈
몇 거풀 더 깊은 땅의 밑바닥에도
유원(悠遠)한 꿈과
억겁(億劫)의 묵념이 있어 왔습니다
마침내 천뢰(天雷)처럼 번득일
자하(紫霞)빛 수정이며 화정(火精)같은 홍옥(紅玉)같은 홍옥(紅玉)들
흙 속의 긴 세월을 견뎌서
그리스도는
머쟎아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갈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태아를 품은 자궁(子宮)의
그 우람한 암울
밤의 강물처럼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이
굽이쳐 소리쳤음을
누구도 헤아려 알지 못했답니다
어둔 저류
그 적멸(寂滅)의 마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羊) 외에는
다른 아무데도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고
표표히 흰 옷자락 나부끼며
적막한 광야에
홀로 천애(天涯)를 보고 계심이러니
마지막 남은 인자(人子)의 붉은 피는
골고다의 등성길 위에
뿌리고 갈지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야훼 내 아버지만이
굽어 이를 보옵신다는
높은 절지(絶地)의
고독이셨음을
썸벅이는 눈자위
먼 해협(海峽)에서처럼
주의 마음을 따라온
한 가난한 여인이 있었읍니다
부활하신 날
처음으로 그 앞에 주의 모습을 뵈이신
이름이여
성총(聖寵)의 마리아 막달레나
풋미역처럼 윤나는
검은 머리채 눈물에 젖고
설백(雪白)의 두 손길 잠잠히 옥합을 열어
예수의 머리에 부어 바치는
오오 영묘(靈妙)한
동방의 향유
사람들은
기름값 삼백 대나리온을 시비하며
무위(無爲)한 낭비를 하는 여인이니라고
서름한 이방인의
눈짓으로 둘려 서 보고
대지를 태우는 모진 뙤약볕은
지지듯 내려쬐는데
여인은 긴 머리채 기름에 적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노니
음향도 없고
시간도 멈춘
오직 태초의 고요 속에
주를 뵈옵도소이다
여기 주를 뵈옵도소이다
아아 우러러 천상의 환희와
엎디어 지상의 여인인
이 절대의 절망.....
옳도다
나의 마음에서 심히 가까운 자여
처가 한 일은 곧 나의 장사(葬事)를
미리 준비함이로다
그리스도만이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 기름 향기롭고
향기롭더라 전합니다
낙 일(落 日)
알겠습니다, 지금 알겠구먼요
당신이 나의 누구이었나를
그 가슴 늑골(肋骨)하나로써
나를 빚던 날
숨쉬는 한점 살과 몸서리나는 피, 피
그 아픔을 먹여 나를 가르신
당신임을 아겠습니다
당신의 눈짓이
당신의 느낌과 생각함과 소리침이
차례로 내 몸에 옮겨오고
그 마음 그 영혼까지
거울 속처럼 환히 비치는
운명의 초상(肖像)으로
나를 기르신
당신음을 알겠습니다
오늘은 내 키가
당신에게 및고
나의 잉태마저도
그 전날 당신의 그것과 같음이어니
오오 낙일(落日)
인젠 피 흘리며 흘리며
당신이 죽어가심이여
하늘 온통 끌어 덮고
스스로 불사르는 정결한 불길
숙영한 이 어둠 속에
지금은 내가
생명을 해산해야 합니다
만 가(輓 歌)
노래를 청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름을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검은 밤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뭇별 눈감겨 주십시오
작은 틈새도 실오리만한 빛도 막아 주십시오
구석진 나의 골방에서
홍건히 피를 쏟아야 할 시간입니다
까닭을 묻지 마십시오
내 병을 따지려 들지 마십시오
그저 긴긴 밤이 있어야 한다고만 알아주십시오
돌기둥에 머리를 부딪고 죽고싶던
야문 납덩이같은 외롬도
이 밤엔 내 피 속에 빠져 가녀린 나비처럼
숨져야 한다고만 알아 주십시오
죽어가는 사람이 거짓을 말하지 않듯이
나도 이 밤에 거짓말을 아니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내가 왔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내가 못간
그 한 가지밖에는
아무 설움도 보챈 일이 없었습니다
천심(天心)에 치솟던 피어린 연호(蓮呼)
지심(地心)으로 부어 보낸 한없는 눈물
나의 이름을 불러 주지 마십시오
나의 이름을 엿보려 들지 마십시오
지금은 내 편히 쉴 그곳으로 어서 가렵니다
이따끔
동혈(洞穴)같이 허줄한 가슴 붙안고
어린 아들처럼 안기려 오던
착한 내 사람 착한 내 사람
아무래도 목숨은 졌고
꽃잎인 양 훌훌 목숨은 졌고
남은 건 부디 수정(水晶)같은 체념(諦念)이어야
하겠습니다
뭇별 눈감겨 주십시오
영원히 어둠으로 두어 주십시오
무덤엔 아무 말도 새기지 말아 주십시오
행여 슬펐다고 말을 전하지 마십시오
오 월
어서 오십시오
해풍 오는 창변으로 당신은 오십시오
막달레나의 향유처럼
눈물과 묵언(默言)만으로
우리
손을 잡고 서 있습시다
햇빛을 물면 금시에 피가 도는
몇 갑절 꽃이피라보다야 미덥고
더 고운 초록 잎사귀
미움도 없이
갈라진 사람들의
그러한 설움이
모가지에 모가지에 감겨오는 시절
서로들 해면(海綿)처럼 가슴 습하고
산 어머 두고 온 어머니런듯
얼마나 보고싶던 보고십던
푸른 오월입니까
소 녀 에 게
네게 드리마
소녀여 이 노래를 네게 드리마
눈벌에 피어나는
불같은 동백꽃과
돌 속에 수(繡)를 놓는
보석의 화문(花紋)
핑그르 눈이 젖는
고운 사모와
먼 성좌(星座) 애틋이 안겨오는
푸른 꼬리별
사파이어의 원광(圓光)도
네게 드리마
소녀여 이 노래를 네게 드리마
풀숲에서 절로 배운
풀색 노래와
바닷가 절로 배운
물색 노래와
달밤에 절로 배운
달빛 노래를
소녀여
내 잃어버린 미소여
가 을 에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해바라기 씨앗 검게 여물고
이산 저산 솔바람에 곤충들 제집에 숨느니
꽃은 무덤에만 피고
가랑잎 불속에 던지며 던지며
도무지 제실(祭室)같은 마음
그리운 당신이여
이 사모를 길러 고이 당신께 드리기 위해
나는 채어났다고 믿어 왔습니다
당신을 낳으시던 날
당신 어머니께서 땀 흘리시고 이윽고 기뻐하신
그러한 수고와 기쁨이
당신과 늘 함께 하기를
그곳에 나도 있기를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내 손을 이끌어 주시겠지요
열손가락 낱낱이
지환(指環)처럼 당신의 사랑을 감아 주시겠지요
마지막인 양
모든 일이 귀하면서
첫시작인 듯
모든 일 공손하게
그리운 이여
지금은 우리가 떠나 있다 해도
머쟎아 모든 슬픔을 잊을 것입니다
내 두 팔에 머리를 뉘이고
당신은 그냥 편히 쉬십시오
가을이 오면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미명(未明)의 날
우리 두 목숨에 이 한번이면 흡족합니다
신이여 구원하심을 베푸소서
다시는 회복되니 못할 듯싶은
나쁜 마약같은 절망이옵느니
여윈 손가락같은 초 한 자루도
숭엄한 신목(神木)인 양 드높이 바라뵈는 통절한 눈짓
이처럼 가난한 기원임을 살펴주소서
불빛 고이 다 가고
심지마저 수은(水銀)처럼 식어버리고
그뿐
하늘의 어느 별 하나라도
사람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랍디까
종내 핏덩어리같이 민들민들 겁나고 기막히는
태양은 솟는데
견디며 견디며 살아야지요
치렁치렁 머리채마냥 목에도 가슴에도 감겨오는
긴 긴 이 미명(未明)의 날을
태초에 사람으로 사람 옆에 세워주신
신은 내 이날을
감당해 주셔야 할 것이언만
낙엽은 쌓여라
돌 위에 돌을 뉘이자
돌 위에 돌처럼 굳어진 나를 뉘이자
낙엽은 쌓여라
낙엽은 쌓여라 죽은 나비야
그 위론 흰 눈이 깔리고
흰 눈 위에 연한 혈액(血液)처럼
붉은 노을은 흘러라
꽃잎은 문
시내처럼 흘러라
인생은 하나의 희사(喜捨)
사슴(砂金)과 같은 미소(微笑)가 나를 건드린다
오오 노래여
사랑은 보다 더 전심(全心)의 희사
돌 위에 돌을 뉘이자
돌 위에 돌처럼 굳어진 나를 뉘이자
이대로 시간이 못을 박아 주면
이 마음 영 이처럼 있겠지
인생은 하나의 참회
낙엽은 쌓여라
낙엽은 쌓여라 녹슨 동화(銅貨)처럼
사랑합니다
가시 돋친
그러나 눈부신 장미의 관(冠)입니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이 가파로운 천인(千?)의 준령을
그 이름 섬기려 왔겠습니까
샘물이 잠잠히 고이듯
외따른 숲그늘네 소리없이 지운
허구헌 날의
눈물
당신으로 인해
슬픔도 이처럼 현란하고
당신으로 인해
쓸쓸함도 느껴워 간절하거니
당신으로 인해
부디 나의 이름이
쓸모있게 하십시오
당신은
내 영혼에 열린
최초의 창문
내 눈이 바라보는
최초의 새벽
잊으려던 마음은
오히려 더 못잊는 마음인 줄을
그리운 당신은 아셨는지요
눈보라 산허리를 치고
빙실(氷室)의 인어(人魚)들 더욱 해심(海心)으로
돌아눕던 밤
불시에 백만의 별들이 솟고
별빛 아래 돌아와
내 눈빛을 살피시면 당신은
한 줄기 금이 간
아픈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달밤엔 달빛에 부서지고
바다의 물결도 깨어져 비치건만
그러나 여전히
내 사랑의 사람
곱디 고운
길 하나의 베퍼 주십시오
푸르른 초원(草原)을 함께 가고
함께 넘으리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백 국(白 菊)
그전날 누군지
핏줄기 더운 탓이라던
그 말 한마디는
백년 형벌(刑罰)을 내다보았음인가
한평생 예서 끝난 듯이
훤하게 빈 마음 하나
내 몫으로 남아.....
손끝이 저려 오도록
희디 흰 국화를 보고 있으렵니다
하얀 이 꽃잎에
눈이 멎은 채
가만히 죽어간다 해도
부디 석양같은 사랑으로
나를 회상해 주십시오
가을산 가자던 사람
저 혼자
삼삼히 가을산 보러 가고
거리로 가자던 사람
저 혼자
총총히 거리를 찾아 들고
은행잎 뚝뚝 지는
해질녘 조락의 길을
저마다 아득한 외롬에 싸여서들
가고 갔는데
고요하게
고요하게
꽃을 바라보며 있으렵니다
눈도 무디고
귀도 무디었는지
명암(明暗)도 모를 곳에
백국은 홀로
피고 지누나
제 10부
「목숨」에서 타오르는 생명의 불종소리
(첫번째 시집. 1953)
꽃
나는 당신의 옥토(沃土)
무심히 뿌리신 씨앗이 이렇게 곱게 꽃폈습니다
자 어서 여기 와 당신의 꽃을 안아 보십시오
입술 갖다 대면
연지(嚥脂)처럼 수줍은 꽃이랍니다
사 랑
오랜 잊히움과도 같은 병(病)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
늘처럼 돋아나도 북녘 창가게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
던 것을
하루 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기러기를 보았
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수 가 있었습니다
합 원
나 정말 착하게 살으리라
촛불 하나 함께 두 목숨의 화재(火災)
밤이 홍수마냥 흘러나고
천년 푸르름에 길든 지극(地極)의 해초(海草)처럼 풋내 싱
싱한 머리털 끌어올리고 들여다보면 네 눈 속이 어인 화염
(火焰)의 동산
사랑은 아픔이라고 하던 것을
사랑은 하고 나면 또 거기 사랑은 남아 있어
이처럼 우린 고운 상흔(傷痕)이 늘어랑 갈 게지만
촛불 하나 그 아까운 백랍의 눈물을 태우고
밤은 눈썹까지 몰려왔다
나 정말 착한이로 살으려기
헐벗고 굶주림이랑 정녕 견디며 살으려기
이 하늘 밑 오직 한 사람의
너를 지니고 싶음이라
설움과 아쉬움에 너를 지니고 싶음이라
아아 어느 세월에고
한번은 있어줄 거룩한 허용
눈물 펑펑 쏟아지는 태양의 자비를 믿고서
다시는 나뉘지 말자
그리하여
이로부터 우리들은 온갖 세상에
둘로써 살아가자
죄
벌하지 마시업소서
진실로 그들을 벌하지 마시옵소서
당신 앞에 내가 잘못한 일에 비하면
그들 내 앞에서 잘못했음이
너무도 적사옵니다
즉 그리스도 내 넋의 아버지신 이여
어찌 온전키를 바라리까마는
산처럼 높아진 잘못 또 잘못이었사오매 핍박과 치욕과 좁
혀진 천지가 모두 나로 인하여 죄됨인 줄 아옵나이다
어둠 살라먹고 달빛 살라먹고
바다에 서면 바다 물결에서
시냇물 가에 서면 시냇물 줄기에서
어디라 곳곳이 내 시체
내 다 헐어진 시체
두둥실 떠내려오고
주여, 이 목숨 불살라 한줌 재 되게 하시옵소서
다만 죄없는 한줌 재 되게 하시옵소서
주 그리스도 영생을 가르치신 이여
심 화(心 火)
소녀가 있고 성당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화강석 층층계를 오르내리면서
아아 또 여기 선혈을 흘리는구먼요
만 종(晩 鐘)
목숨을 원하셨더면
목숨을 정히 바쳤겠지요
잡초처럼 쑥쑥 디밀던 것
서슬진 칼날처럼 손톱을 박고 서서 욕하고 불붙어
그 몇번 미친 듯 죽을 뻔한 목숨의 오뇌에서
당신을 휘젓고 주무르고
마침내 피를 묻혔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목숨을 주고 받아야만 함일 줄로
알았던 잘못
그래도 못다 지은 죄는
신의 도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성하(盛夏)의 푸른 파도 멀리
어둡는 저녁길 위에
이렇듯 뉘우침을 안고 나 여기 돌아서 있음은
목숨을 달라지도 않고
짐짓 바다만치 사랑해 주시는
당신의 마음을 앎이옵니다
앙제뤼스의 기도 시간,
흰 돌층계에 성촉(聖燭)의 화심(火心)이 번져나고
아아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이 세찬 빛발 속에 명멸하며 있다지요
보람지는 일이 또는 보람지지 않는 일이
사랑에선 문제가 아니됨을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스스릉 울려 오는 만종의 그윽한 여운에서
그늘진 넓은 초원(草原)을
또 한번 품어보게 해 주십시오
목 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모두 하늘이 낸 선선(先天)의 벌족(閥族)이
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태양의 각문(刻文)
가을을 감고 우리 산(山)속에 있었습니다
하늘이 기(旗)폭처럼 펄럭이고 눈 들 때마다 태양은 익은
석류처럼 파열했습니다
당신은 낙옆을 깔고 향수를 처음 안 소년처럼 구름을 모아
동자(瞳子)에 띄웠으며 나는 한아름 벅찬 바다를 품은 듯이
당신과 가을을 느끼기에 한때 죄를 잊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벗었음을 알던 옛날 에덴의 경
이(驚異)같은 것이 분수처럼 가슴에 뿜어오르고
만산(滿山) 피 같은 홍엽(紅葉)
만산(滿山) 불 같은 홍엽(紅葉)
아니 아니 만산 그리움같은 그리움같은 홍엽에서 모든 사랑
의 전설들이 검붉은 포도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청량한 과즙(果汁)처럼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스쳐갈 뿐
사변 광박한 하루의 천지가 다만 가을과 당신만으로 가득차
고 나는 차라리 열병 앓는 소녀였음이여
사랑한다는 건 참말 사랑한다는 건 또 하나의 나, 또 하나
의 내 목숨을, 숨막히도록 숨막히도록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내 목숨 아아 응혈(凝血)처럼 뜨
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나는 비수(匕首)처럼 한 이름을 던져 저기 피 흐르게 태양
을 찔렀으니 그것은 이 커다란 우주 속에서 내가 사랑한 그
으뜸의 이름이었습니다
고 독
이제 나 다신 너 없이 살기를 원치 않으마
진실로 모든 잘못은
너를 둘러놓고 살려던 데서 빚어졌거니
네 이름은 고독,
내 오랜 날의 뉘우침이
네 앞에 와서 머무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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