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향기

젊어도 보았네 늙어도 보았네

엄마라는 나무에 자식이라는 꽃을 피워 그 향기가..."

도서관 (지식 충전...

창작의 기본 태도

가을비 우산 2017. 8. 19. 22:36

<글 쓰는 법>, 배워도 안 되는 원인 

 

 

첫째 원인:  글을 잘 써야 되겠다고 생각만 할 뿐, 실제로는 글을 쓰지 않는다. 그게 ‘배워도 안 되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면 실력은 늘지 않는다. 교재를 공부해서 글 잘 쓰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더

라도, 실제로 그걸 자꾸 써서 익히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원래 글쓰기는 금방 늘지 않는 거다. 방

법만 배우고 실습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거꾸로 가기도 한다. 글을 보는 안목은 높아졌는데, 거기

비하면 자기가 쓰는 글이 너무 엉망이어서, 글쓰기가 싫어지는 거다. 

 

둘째 원인:  글쓰기 교재는 읽을수록 모르게 된다는 사람도 많다. 사실, 글쓰기 방법은 사칙 연산 방

법이 아니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은 구구단만 외우면 오케이지만, 글쓰기에는 구구단 같은 간단

하고 명확한 방법이 없다. 그게 ‘배워도 안 되는’ 둘째 원인이다. 글쓰기 지침들은 대개 모호하고 예

외도 많다. 예로 <글에 쓸 내용이 뭔지 명확히 파악한 다음에 써라>는 좋은 글쓰기 지침이지만, 그

것만으론 안 된다. '글에 쓸 내용'이란 게, 이리저리 글을 써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경우도 많기 때

문이다. 

 

셋째 원인:  그래서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다>는 걸 신봉하는 사람들도 많다. 글쓰기는 오로지 글을

쓰는 방법으로밖에 배울 수 없다는 거다. 뭐, 그렇게 믿는다면 마음은 편하다. 그냥 쓰고 또 쓰고 하

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뭐가 찜찜하다. 그래서 오다가다 글쓰기 지침들을 기웃

거리는데, ㅋㅋ 그렇게 미지근하게 배우니까, 배워도 안 되는 거다. 그게 셋째 원인이다.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해보자. 잘 안 된다. 젓가락질하는 법은 잘 안다(오른손으로는 젓가락질을 잘한

다). 왼손이 젓가락질을 하는 걸 보면서 이리저리 교정을 해보기도 하지만 잘 안 된다. 의식적으로 생

각을 하면서 해서는 아무래도 엇박자가 나고 힘이 든다. 왼손용으로는 아직 자동회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자동회로가 생겨날 때까지 자꾸 연습해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쓰기

지침을(예로 오른손 젓가락질 방법 같은 실제적인 지침) 배우고, 자꾸자꾸 글을 써봐야 한다. 

 

 

 

[개요 짜기 (작성법)]  6. 개요에 홀려서 함정에 빠지기

 

 

다 된 일로 착각하기 일쑤다. 뭘 어떻게 쓸지 몰라 막막해하다가 어찌어찌해서 개요를 작성했다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체계도 멋지게 잡았고, 항목마다 뭘 쓸지도 아니까... 이젠 쓰기만 하면 돼."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개요는 항목 나열에 불과한 수가 많다. 자기가 만든 것이니까,

항목마다 이미지가 풍부하고 또 항목들이 멋지게 연결된 듯한 착각이 생기는 거다. 이건 누구에

게나 올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다. 초보자는 이걸 알아야 한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구체적인 쓸거리가 아니다. 한 덩어리 사건에서 이미지는 생겨날 수 있어도, 이미지만 가지고

구체사건이 생겨나는 건 아니다. 멋진 연결은 멋진 연결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멋진 연결이다.

미약한 연결선 하나를 침소봉대해서 튼튼하고 멋진 연결로 착각한 거다. 

 

자기가 짠 개요에 홀린 초보자는, 쓰기 시작하면서 바로 고생문에 들어가게 된다.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내 느낌이 얼마나 확실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쓸거리가 없어서 허둥지둥

자료를 찾아다니거나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머릿속에서 뭔가 만들어내려고 골머리를 썩인다.

그렇게 애써서 항목을 채웠더라도, 전후 항목과 연결하는 게 큰 문제다. 개요 짤 때는 멋지게 연결

되었던 항목들인데, 실제로 쓰다보니 연결할 방법이 없는 거다. 무리하게 연결은 할 수 있지만, 그

러다가는 일관성 없는 글이 되어버린다. 

 

쉬운 글은 간단한 개요로 충분하다. 머릿속에 관련 자료가 많고 또 할 말을 연결하기 쉬운 글이라면,

간단한 개요로 충분하다. 예를 들어, 경험담은 요점과 초점 몇몇을 메모한 개요로, 수월하게 쓸 수

있다. 개요에 홀리거나 말거나 말이다. 오히려 홀리는 게 좀 낫다. 자신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으

니까... 말하자면 발명을 할 수 있는 창의적인 분위기다. 쓰다가 실수도 하게 되지만, 쉬운 글이니

까 금방 고칠 수 있다. 그건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자료도 빈약하고 또 연결이 복잡한 글이라면, 개요에 홀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애써 개요를 짜놓고는,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고, 그것 때문에 함정에 빠지게 되니까 말이다.

개요는 길잡이다. 뭐가 이상하다 싶으면, 어떤 길을 찾으려고 개요를 짠 건지 다시 한 번 살

피는 게 좋다. 개요에는 자료수집용 개요와 중심정보파악용 개요와 초안작성용 개요가 있

다. 당신이 쓴 개요가 자료수집용이라면, 당신은 바로 초안 쓰기에 돌입하지 말고,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http://cafe.daum.net/tapgun/dCH/174 

창작의 기본 태도(비평)
                                                                                백현국

많은 작품들이 인터넷 상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 습작의 수준은 놀라운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습작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창작
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과 독단적인 태도일 것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각종 이론과 원
론에 대한 견해의 충돌과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 시대나 사조,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따라 문학이 어떠한 노선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과거의 문학적 환경 이해와
문학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배우게 되고 나아가 현실에 처한 시인들은 철저한 자기만의 독특한 인식을 작품에 반
영하게 된다. 그 인식이란 바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스템,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힘을 말한다.


각 사이트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부 습작들과 일부 기성 시인들의 작품속에는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내용이 너무 단순성이다. 내용이 창의적이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리 시를 잘썼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고 볼 수 있다. 꽃을 아름답다고 한 시는 시라기 보다 서술에 가까웁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물
을 보고 누구나 같은 감성으로 쓰는 것,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측면이 무시된 시어의 구사 등으로 쓰여지는 작
품은 내용의 있어 참신성이 없는 글이 되는 만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있어 창의적인 안목을 가져
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싶상이다. 비록 글은 세련되지 못
하여도 내용은 아주 감동적일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을 말함이다. 깊이를 주지 못하면 가장 유혹 받기 쉬운 것이
 바로 형식의 난해다.


둘째는 개인의 총체적인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작품이다. 깊은 사유의 틀에서 출발 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말비틀기 즉 언어의 유희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시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 언어의 효과음이나 언어의 모사 이미지의 변용은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깊은 사유란 곧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고 보면 그 세계관이 어느날 문득 깨달아지는 선禪적인 깨달음과는 다른 것이다.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천착으로 나타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처한 세계관을 해석해 낼만한 사유의 틀이 없어서
오히려 왜곡된 사상寫像과 일탈된 시스템에 역이용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식민지를 겪고 독재를 겪은 우리 문학
계에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구체성이나 정확성이 결여된 나머지 관념적인 시를 쓰는 경우이다. 관념이란 개별 시인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아주 요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이란 적절한 시어와 효과적인 비유나 상징에 장애요소이다.
자신의 관념을 시로 옮겨 쓰다보면 각 이미지간 연결이나 시작 속에 나타나야 하는 종결의 거리를 잊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관념을 시로 옮기면 알 수 없는 시어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는 데 이는 무질서한 시어의 남발이나 무
의미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시를 알 수 있으나 독자는 그 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말만 늘
어놓고 아주 수준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강요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모호한 표현의 문제요 적절치 않은 시어의 사용
이다. 시어를 사용함에 있어 이 시어의 사용이 적절한지, 정확한지는 반드시 따져보고 써야 한다.


넷째는 자기만 감동시키는 시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이다. 습작이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에 그치고 말면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대
부분은 습작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토로는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킬
지는 모르나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가 마침내 독자의 감성을 박탈시키는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작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보여주고 싶은 시가 주류가 된다. 보여주고 싶은 시란 결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쪽으로 가게 되는데 결국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시로 가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습작을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는 분명 글의 폭력이다. 남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습작을 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공부하지 않는 습작 시인의 문제이다. 습작은 글의 기교적 측면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다. 습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고, 그들의 작품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글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절대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시 창작에 관한 공부와 사조 그리고 문학의 개론서 정도는
독파를 하고서야 습작을 하라는 얘기다. 인간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시를 쓰지 않는 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작의 문제보다 모작을 방지하는 문제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일부 시인들은 자신이 하고싶은 말과 쓰고싶은
글은 모두 작품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들은 적있다. 이러한 글은 비평조차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작품은 구조성이 중요하다. 흔히 문학 작품의 내용구조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건축물에는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구조가 대단히 중요하듯 작품에도 구조의 중요성은 중요하다. 작품은 일종의 구조를 갖는다. 일자시가 아닌 이상
반드시 처음/중간/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구조가 부실하면 시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상
기승전결이나 서/본/결이 단단하지 못할 때, 작품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전개하던지, 하강하던지,
아니면 처음과 끝이 연결되도록 장치하는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각 내용과 각연들의 내용이 서로 관련성이 없을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이러한 연결구조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주 본다.


끝으로 습작은 습작이다. 습작이란 수정을 요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계속적인 습작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발표

되어야 한다. 발표란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보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세상에 남는다는 뜻도 된다. 이는 독자들은 물론
평자들의 평가를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한 때 이미 작고한 시인들의 미발표 시작을 공개하고 책으로 낸 경우
가 있었다. 이것은 그 시인을 욕보인 뜻이기도 하다. 피치못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성작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미발표작
을 공개하는 것이 얼마나 그 시인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쳤는가는 한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창작이란 늘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이는 아픈 작업이어야 한다면 그래도 너무 심한 말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