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초, 봄날씨가 종잡을수 없어 옷차림이 조금은 어중간 할때였지만 그래도 오랜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대구 막창에
술 한잔이 생각나 더는 미루지않고 옆지기랑 열일 재치고 어느날 무작정 집을 나서서 대구로 출발을 했다.
오늘 계획은 사문진 나루터에서 점심을 먹고 대구 시내에 들려 막창으로 쇠주 한잔 비우고 저녁시간에는 듀란공원의
이월드 별빛벚꽃축제를 즐길참이다. 이왕 나선 길이면 연계해서 일타 상피? 고루 즐기다 가는 것이 알뜰 여행이 되겠다..
사문진/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에 있던 조선시대 나루터.
[개설]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마을은 조선 인조 때 개척되었는데, 낙동강 범람으로 인해 늪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 ‘늪마을’
이라 하다가 120여 년 전 이씨라는 선비가 들어와 마을 앞 큰 호수를 보고 ‘호촌’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낙동강이 범람
할 때 이곳 흙을 많이 훑어갔다고 ‘훑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06년(고종 43) 고령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천동, 사동, 사문(沙門), 사문(寺門)이라 하였다. 사문(沙門)은 낙동강 홍수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어 호촌2리
에서 모래를 거쳐 배를 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큰 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문(寺門)이라고도 불려졌다.
[변천]
사문진나루터는 조선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나루였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
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나루터가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17)
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문진나루터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왜에서 이입된 물품을 보관하는 화원창(花園倉),
왜물고(倭物庫)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에 폐쇄되었다. 하지만 사문진나루터는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조선시대 대소비지 대구를 대상
으로 하는 남해안의 돛단배나 범선의 입출항이 잦았는데, 주요 운송 해산물로는 소금, 미역, 김, 어물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 바로 사문진나루터였다. 1901년 5월 이른 아침 피아노 1대가 어설프게 포장되어
인부 3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신기해 하였다.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나루터를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는데, 당시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20만 석, 콩 10만 석,
우피 40만 근과 그 밖의 잡곡, 양재, 잡화 등과 소금 10만 석, 석유 3만 5,000상자, 성냥 6,000상자, 옥양목 6만 단, 무명 10만 단,
방적사 1,000가마와 그 밖의 견, 면직물류, 약재, 잡화 등이다. 이것들의 약 5분의 2가 대구 시장을 통해 분산 소비되었고, 나머지
5분의 3 정도는 대구를 중계지로 하여 대부분 낙동강을 통해 부산 및 상류 각지로 수송되었다.
이 밖에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 운영권은 주로 입찰로 정해졌고 승객
대부분은 서쪽 고령군 다산면 주민들이었다. 도선은 처음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이었으며, 이후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였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철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도 10t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있었다. 특히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고령과 달성을 오갔다. 당시 하루 평균 100여 대의 차량과 1,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마을 사람이면 1년에 벼 1말 5되 정도를 선주에게 지불하고, 일반인은 1인당 500원, 중학생 이하는
무료였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 시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다.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 많은 사람들
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유원지도 유명해졌다.
철도 개통 후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사문진교 준공과 동시에 한여름 나루터 근처 모래사장을 찾던 피서객
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현황]
현재 사문진나루터는 대구광역시 정수장으로 바뀌어 있다. 사문진나루터가 있던 곳
위로는 2009년 총사업비 400억 원을 들여 교량 780m, 연결 도로 670m를 2차선에서 4차선
으로 확장 개통한 사문진교가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추위를 잘타는 체질이라 외투 하나를 더 챙겼더니 당시에는 몰랐는데 사진으로보니 진짜 계절이 무색할 옷차림이다. 흐미 창피한거...
나루터옆 공원안 주막촌에서 잔치국수에 막걸리 한사발... 간만에 맛보는 두부김치였다.
어쩌다보니 황반증이리는 안질을 갖게되어 본의아니게 착용하게된 선그라스,. 자외선을 피하라니 보기엔 좀 머시기해도 어쩔수가 없다.
내 시력에 도수를 반영 맞춤한 것이다.
대구 시내에 유명한 빵 골목이 있다하여 막창먹으러 들리기 전에 일부러 또 빵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먹어보니 맛나긴 하더라.
내 입맛엔 단팥빵 보다는 삼송빵이 더 내 취향...
슬금슬금 햇살이 서녘으로 기울어 갈즈음에 드뎌 곱창골목에 입성,
여기저기서 서로 오라 호객하는 식당 중에서 골라잡아 어느 한집에 안착을 했다. 허리끈 풀고 술배 한번 채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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